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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노마드 경제 10 만남 안에 숨겨진 성공

룻기 3 : 7 - 13

 

룻과 나오미의 비극

 

역사는 만남이다. 성공은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인생은 만남 그 자체이다. 그만큼 만남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때로는 우연한 만남으로 삶이 통째로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나오미와 룻은 객관적으로 가장 비극적인 여인들의 표상이다. 일찍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이주한 나오미와 그 가족은 뜻하지 않게 며느리들만 남기고 아들 둘이 모두 객사를 하는 불운을 겪는다. 졸지에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과부 며느리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막막한 미래를 설명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녀들의 인생은 이제 끝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인다. 과부들의 삶이 그런 것처럼 그녀들도 소외와 차별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과부는 가장 낮은 자일뿐이다. 그녀들에게 소망은 없다. 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모두가 그 정도의 삶을 바라만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고 답이 없어 보인다.

특히 며느리 룻은 모압 여인이다. 이주여성인 것이다. 그녀는 이방인이고 과부이다. 그 시대의 낮은 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갖고 있다. 이미 그녀는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가장 밑바닥의 여인으로 추락해 있을 뿐이다. 누가 그녀를 구원할 것인가?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돌아온 곳은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으로의 이주는 그녀들의 삶을 새롭게 바꾸는 도전이며 패러다임의 변화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판을 바꿀 수 있는가이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삶이 재미없고 비루하다면 한번은 판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게임의 룰을 바꿀 줄 아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비극의 끝에 새로운 기회가 있다.

절망할 터이면 마지막까지 절망하라. 아플 터이면 끝까지 더 이상 아플 수 없을 만큼 아파하라. 비극적일 터이면 비극이 웃길 정도로 비극을 경험하라. 너무 아프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런 경험을 했었다. 어릴 적 고등학교 시절 강가로 놀러가 발바닥에 큰 상처를 입고 밤새 비가 오는 여름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아간 그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친구들에게 업히다시피 하여 찾아간 병원에서는 마취도 없이 수술을 했다.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의사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 모두가 기겁을 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그러나 나는 미친 것이 아니라 너무 아프니 나중에는 웃음이 나온 것이다. 너무 아프면 웃음이 나온다.

비극이 희극과 맞닿아 있는 경계에 하나님이 계시다. 비극과 희극은 동전의 앞뒤처럼 공존한다. 하나님이 계시면 그곳이 비극이 희극이 되는 경계인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비극의 끝에 계시다. 나는 한 번도 그분이 희극 쪽에 계심을 본적이 없다. 비극의 끝자락에 서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이다.

나오미와 룻이 경험한 삶이란 그런 비극이다. 그러나 인생은 늘 비극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존재 이유다. 비극만이 있는 삶이라면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한다. 구원은 비극의 끝에서 시작되는 희망의 샘물이다. 룻이 마주한 비극의 끝, 새로운 인생의 출발에서는 그런 드라마가 연출되었다.

그러므로 비극을 비극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다. 비극은 언젠가 새로운 희극의 출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비극도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룻은 베들레헴의 황량한 벌판에서 보아스를 만났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제의 법에 따라 주어진 한가닥의 희망이, 그녀를 예수 그리스도의 할머니로 격상시키는 새로운 만남의 접경으로 인도하였다. 그렇게 희망은 마지막 절망의 끝에서부터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다.

모든 가을은 쓸쓸하다. 어디에도 남은 것은 없어 보인다. 가을걷이가 끝난 벌판은 그대로 황량하다. 그러나 그 마지막 벌판에도 남은 것이 있다. 하나님이 남기라 하신 것들이다. 그것이 희망이다. 남기신 것들을 추수하라. 남겨진 아니 버려진 것을 남긴 것이다. 버려짐으로 남겨진 몇 알의 알곡들이 새로운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였다.

룻이 찾아간 벌판에서 그들은 만난다. 보아스다. 그 땅의 주인이다. 그때 룻이 신데렐라의 꿈을 꾸었을까? 모압 여인이며 과부였던 룻에게 어떻게 이런 대박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래서 삶은 끝까지 살아보아야 한다. 살다보면 그 삶속에 어떤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도 나도 아직 삶은 끝나지 않았다고 소리질러보자.

 

만남에는 성공의 기회가 있다

 

성공은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몽골여자 엥케를 만난 것도 그 하나의 예이다. 그녀를 만난 곳은 성수동 어느 교회의 지하실이었다. 내가 일하던 외국인 근로자선교회의 사무실이다. 그날도 그렇게 나는 절망하고 있었다. 갈 곳 없이 버려진 자신의 인생을 아파하고 있었을 때였다. 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너무도 슬프고 아팠다. 매일같이 울고 울었다. 그렇게 울고 있을 때에 엥케가 찾아왔다. 나보다 더 슬픈 표정으로...

그녀의 문제를 들었다. 그녀는 살려달라고 했다. 상사병을 치료해 주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이란남자를 찾아가 면회를 시켜 주었다. 그 자체가 기적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했을 때의 그 희열을 느껴본 날이다. 그 후로 나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것이 곧 내 존재의미였으며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에게 다가온 것은 몽골이다. 엥케라는 여자로부터 몽골로 이어지는 엄청난 변화가 시작되었다. 몽골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를 가져다 준 시작은 엥케라는 여자와의 만남으로부터다. 너무도 우연한 만남이었던 그날의 만남이 오늘 나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크게 다가온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삶은 만남이다. 역사는 그렇게 만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 만남을 소중히 여기라

 

룻이 보아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떤 역사가 기록되었을까? 왜 하나님은 룻이라는 과부 이방여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셨을까? 하나님께서 룻이라는 여인을 사용하시는 방법은 이토록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하다. 그렇다면 룻의 삶은 오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도 룻이 될 수 있다. 룻이 그렇게 쓰임 받았다면 우리도 룻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만남에 대한 태도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만남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 때 기회가 온다. 기회는 작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해외로 단기선교를 나가면 함께 간 분들과 만남이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나섬에서 만나는 수많은 나그네들 속에 하나님의 사람이 숨어 있다. 군중 속에 하나님의 사람이 숨겨져 있다. 스치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그 순간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 스치는 바람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다가올 수 있으니 말이다.

호잣트를 만난 것도 판가즈를 만난 것도 그 순간의 만남이었다. 그때에 나는 그들을 보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느낌으로 알았다. 나와 나섬이 여기까지 인정받고 살아올 수 있었던 근거는 만남이다.

엥케라는 몽골 여자, 호잣트라는 이란 남자, 판가즈라는 인도 친구, 롤란도라는 필리핀 형제, 투하라는 베트남 자매, 자파드와 세미와 수많은 나그네들이 기억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분명히 떠오른다. 그때에 조금 더 사랑하고 살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지금보다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우리는 너무 무지하다. 성공하기 원한다면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만남을 기뻐할 것이며, 순간의 느낌에 충실하여야 한다. 그래서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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