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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톡137 그리스에 대한 새로운 자각, 그리고 새로운 도전

   그리스는 내게 아니 한국교회에 있어 대단히 낯선 공간이다. 단순히 바울 사도의 선교가 이루어진 것 빼놓고 그리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한국교회에 있을 성싶지 않다. 그리스 신화나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선교적으로 그리 크게 관심이 있는 곳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는 교회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진 이후 그리스는 정교회의 중심국가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정교회의 역사를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서방교회의 전승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국 개신교는 정교회를 이단시하려는 무지한 태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정교회는 세계교회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다. 주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그러니까 지금의 터키의 이스탄불로 동로마제국을 옮긴 이후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보다 월등히 수준 높은 교회역사를 갖고 있다. 실제로 동로마는 1453년 멸망한데 반해 서로마는 476년에 사라졌으니 그 역사만으로도 충분히 동로마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서로마는 새롭게 다시 부활하여 중세 기독교의 중심축이 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동로마는 한 시대의 역사를 이끌었던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 동방교회의 중심이 바로 그리스정교회다. 사실 그리스는 동로마제국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바울 사도의 선교에 있어서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사도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 드로아에서 보았던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으로 바다를 건너 네압볼리 지방의 빌립보에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세워 선교의 영역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다시 세계로 확장시킨 곳이 오늘의 그리스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바울 신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공간이던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 서신 중 가장 먼저인 데살로니가서가 쓰여 졌으며 후에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쓰여지기도 하였다. 바울은 그 고린도교회에서 선교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던 아굴라와 브루스길라를 만나 자비량 선교의 틀을 잡기도 했다. 바울사도께서 일 년 반 이상을 고린도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새로운 선교와 복음의 핵심주제를 설파하기도 하였으니 고린도교회는 바울 선교에 있어 얼마나 의미있는 공간이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리스에 전세계 난민 중 상당수가 모여들고 있다. 지금은 난민을 비롯한 이주민의 시대이며 난민 문제는 세계적인 이슈다. 난민문제로 유럽을 비롯하여 전세계가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난민은 누가 왜 어떤 이유로 만들어낸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난민문제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영적이며 선교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인 문제는 곧바로 영적이고 선교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으로 그것은 결코 과장이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세속사와 구원사가 따로 구별될 수 없다. 적어도 세상사는 구원사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난민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계획이다. 성서의 관점에서 볼 때에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길 위로 인간을 밀어내시면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에서부터 리브가와 야곱과 요셉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철저히 성안에서부터 길 위로 끌고 나오신다. 성안에 있는 자는 구원사에 쓰임받지 못한다. 길 위의 인생으로부터 구원역사는 시작된다. 그러므로 길 위의 인생을 주목하여야 한다. 난민은 바로 그 길 위의 사람들이다. 이주노동자를 비롯하여 난민은 집에서 나온 가출한 존재들이다.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도전하고 개척하려는 이들이다. 그들은 나그네이며 유목민들이다. 나그네가 순례자가 되는 것이 선교다. 순례자는 나그네들의 구원사적 개념이다. 선교는 성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길 위의 사람이 선교의 대상이다. 그 길 위의 사람들이 바뀌어 순례자가 되는 순간이 선교이며 구원사가 완성되는 시점이다. 그런 길 위의 나그네들이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에 집결되고 있다. 엄청난 수의 난민 행렬이다. 왜 하나님은 그리스를 오래된 바울의 선교지에서 21세기 새로운 선교지로 역할을 변경시키시는 것일까? 그렇게나 불가능하다는 이슬람 선교의 새로운 대안으로 그리스를 사용하시는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지금 네압볼리 빌립보 에게해 앞 작은 호텔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창문을 열면 에게해가 바로 앞에 있다. 일행 중 몇몇은 에게해의 밤바다를 거닐겠다고 호텔방을 나간 모양이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어 기운이 없다. 감기약의 덕인지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느낌으로 창밖의 에게해를 생각해 본다. 바울이 건넜을 에게해의 바다다. 바울사도께서 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건넜다는 그 바다다. 나는 지금 어떤 환상을 보려는 것인가? 감기약 때문인가 아니면 새로운 선교에 대한 부르심인가? 2000년 전의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이 오늘 그리스로 몰려드는 난민들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것은 감기약 때문이 아니다. 확실히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역사이며 구원사다.

이제 그리스는 성지이며 동시에 선교지이다. 마치 터키가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 그 땅의 역사를 다시 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공간이다. 적어도 그리스는 마지막 하나님 나라 선교의 전초기지다. 유럽을 넘어 무슬림 선교의 대안이고 희망이다. 그리스를 주목하라! 경제적으로는 쇠약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는 그리스는 떠오르는 태양이다. 그렇다! 경제적으로 불확실하고 당장의 현실적 삶이 어려워지는 곳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치가 숨겨져 있다. 그리스는 새로운 선교지다. 도전의 땅이고 바울의 선교가 여전히 진행 중인 공간이다. 나는 그리스를 사랑하기로 했다. 이제 이곳에서 새로운 인생과 역사를 쓰려는 이들을 모아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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