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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노마드 경제 8 진짜 부동산 왕이 되라

창세기 13 : 3 - 13

 

 

도날드 트럼프와 아브라함

미국의 대통령 후보 도날드 트럼프는 부동산 재벌이다. 나는 그의 책을 대학 시절에 읽어본 적이 있다. 그때는 책을 읽으며 트럼프라는 사람이 무척이나 대단해 보였으나 요즘 그의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질을 보면 내 생각이 큰 착각이었음이 알겠다. 트럼프가 어쩌다 부동산 재벌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사실 그보다 앞서 가장 위대한 부동산 왕은 아브라함이다. 경제를 논할 때에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부동산이다.

부동산은 경제 문제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주제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전세계는 지금 경제 전쟁 중이다. 경제문제 때문에 전쟁을 하고 갈등이 일어나며 때로 서로 손을 잡는다. 국경의 경계를 허물며 피차 돈이 되는 길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그중 부동산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든 어디에나 부동산 투자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수익률이 많은 곳에 투자를 한다. 돈은 스스로 증식하려는 욕구를 가진다. 돈은 어디든 흘러가 증식하고 키우려는 속성을 가진다. 돈은 노마드다. 특히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서 부동산 투자는 곧 성공의 길이라는 부동산 불패신화의 스토리가 있었다.

 

 

롯과 아브라함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다. 아브라함이 75세에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올 때에 조카 롯도 아브라함과 동행을 했었다. 아브라함에게 조카 롯은 의기투합할 수 있는 동행자였을 것이다. 조카 롯은 그만큼 아브라함을 좋아했으며 아브라함도 조카 롯을 데리고 나올 만큼 사랑했고 신뢰하던 사람이다. 일종의 동업자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살이가 그들의 마음만큼이나 간단했을까. 점점 자신들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면서 그들의 식솔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다. 피차 가축을 유목하던 사람들이었음으로 목자들끼리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더 좋은 곳에서 더 많은 양을 키워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식솔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아브라함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되었다. 롯을 불러 담판을 지어야했다. 이제는 서로가 떠나야 할 시간임을 알게 된 것이다.

성서는 그 갈등을 접고 서로의 길을 떠나는 이야기를 한다. 아브라함과 롯의 협상을 보라. 누군들 먼저 결정권을 갖고 싶지 않을까싶지만 아브라함은 파격적으로 롯에게 우선권을 준다. '네가 먼저 선택하라'는 것이다.

롯이 결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선택할 것이다. 롯이 오른쪽을 선택하면 아브라함은 왼쪽으로 가겠다했다. 결국 롯이 먼저 땅을 바라본다. 그는 눈으로 본다. 눈은 무엇인가?

롯이 본 것은 요단 동편의 초원이다. 그 땅은 가축을 키우기에 좋은 곳처럼 보였다. 요단 동편은 풍성해 보였으며 좋아 보였다. 풀들이 웃자라 있었고 보기에 그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롯의 결정은 옳았다. 적어도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 롯의 선택은 더할 나위없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결국 아브라함은 요단 서쪽의 메마른 땅을 갖게 된다. 그 땅은 풀 하나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 광야다. 지금의 유대광야가 그의 땅이었던 것이다.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기름졌으며 서쪽은 광야였다. 길이 갈라지는 순간이다. 그렇다 인생은 순간의 선택이다.

 

 

아브라함이 보았던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롯의 눈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이었을까? 아니 오늘날도 보통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를 생각해본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정말 제대로 보는 것일까?

사람을 보는 것도 그렇다. 사람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사람을 겉으로 보는 것과 속의 내용은 다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길이 없다는 속담도 있다.

땅도 마찬가지다. 지금 눈으로 보는 땅의 가치와 미래의 가치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지금 값나가 보이는 땅이 미래에도 값나가는 땅이라 자신할 수 없다. 세상은 언제나 유동적이고 가치에 대한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일이란 아무도 모른다. 하물며 땅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결국 누가 승자였을까? 롯이 선택한 요단 동편의 땅은 좋아보였지만 나중에 보니 그 땅은 소돔과 고모라의 땅이었다. 심판의 대상이 되는 패역하고 죄 많은 땅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롯은 그런 땅을 선택했단 말인가? 반면에 아브라함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쪽박 같던 땅은 비옥한 가나안이었다. 눈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복이었던 것이다.

땅의 가치는 누구에 의하여 결정되는가? 땅의 가치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결정되는가? 그것은 미래가치여야 한다. 현실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땅은 결국 땅에 대한 사용계획서에 의하여 결정된다. 미래에 누가 어떤 이유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땅은 사용 계획서가 있다. 그것을 토지사용계획서라 부르자.

국가가 사용할 것이라면 누구도 그 땅에 대하여 함부로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의 결정권이 우선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토지사용 결정권을 갖고 계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부동산의 가치는 누가 사용계획서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계획서는 하나님의 결정권한이었음으로 어디에 땅을 소유하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롯에게 먼저 결정하라 선택권을 줄 수 있었다. 배려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여유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땅 보는 방법

나의 아버지 장로님은 농군이셨다. 농군은 언제나 땅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천직이다. 농군은 땅을 사랑하고 그만큼 땅에 대한 노하우를 갖는다. 농군은 땅에서 나오는 잉여로 살아간다. 아버지 장로님은 농군이셨지만 지혜가 있어 땅 보는 나름의 눈을 갖고 사셨다. 일단 땅은 물이 있어야 하고 높이도 적당하여야 하며 미래의 자산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딱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땅을 보면 좋은지 나쁜지를 영적으로 직감할 수 있다고 하시며 농군의 직감으로 땅을 사셨던 분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돈이 있으면 조금씩 땅을 사는 습관이 있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 장로님을 보고 자랐다. 그 후 나도 땅에 대하여 나름의 철학이 생겼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땅이란 수도권에서 그리 멀지 않아야 한다. 양평의 나섬생태마을은 그런 기준으로 매입한 땅이다. 일단 나섬 공동체에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여야 하고, 만평은 넘어야하며,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양평이 대체로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 땅이었으니 나도 나름 땅을 볼 줄 아는 사람일까?

인간은 자기만의 땅에 대한 철학이 생기는 법이다. 어디가 좋은지는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러나 이미 직감적으로 좋은 곳을 알고 찾아가는 것이 인간과 땅의 관계다. 인간이 땅으로부터 나왔으니 땅은 인간의 고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리라.

지금의 몽골학교 부지도 나름의 기준을 갖고 정한 곳이다. 서울시에서 몽골학교 부지를 주겠다 했을 때 찾은 땅이다. 누구도 그 땅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양평도 그 주변의 오래된 분들의 표현에 의하면 눈먼 자의 땅이라 했다. 그만큼 눈을 뜨고 살아가지만 그 땅의 가치는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지금의 몽골학교도 마찬가지다. 누가 이 땅의 주인일지는 이미 정해 진 듯하다. 우리가 몽골학교를 다 짓고 나니 참 좋은 곳에 학교를 지었다는 마음이 든다.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감탄을 한다. 아차산을 등지고 한강을 바라보는 풍수가 일품인 까닭이다.

버려진 야산으로만 느껴지던 곳에 학교를 짓고 공동체를 세워가면서 나는 땅이란 누구의 것이 되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정해진다고 확신한다. 내가 가면 그 땅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믿음과 신념이 있다면 앞으로도 나는 부동산에 일가견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땅은 주인이 따로 있다 한다. 주인이 가져야 그 땅은 주인을 알아보고 가치를 높여간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해도 주인이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버려진 땅이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있어야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땅은 용도에 따라 그 가치를 결정한다. 궁궐을 지으면 궁터가 되고 변소를 지으면 화장실이 된다.

학교를 지으면 학교터가 되고 무당집을 지으면 우상숭배의 터로 둔갑한다. 예배당을 지으면 성소가 되고 절을 지으면 절터가 된다. 무슨 집을 짓는가는 주인의 몫이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그 권한을 우리 각자에게 위임하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지혜다. 그는 믿었기 때문에 어떤 땅을 소유해도 그 땅의 가치는 달라짐을 알았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버려진 땅이며 황폐한 광야일지라도 언젠가 하나님이 쓰시는 땅으로 바뀔 것이고, 그날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가나안은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미래의 활용가치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내 삶은 주어진 조건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용처에 의하여 결정된다.

내 인생에 무엇을 지을까? 내 삶이라는 부동산에 어떤 집을 지어볼까? 궁금하고 신비롭다. 집의 가치는 그 집의 용처에 의하여 자산가치가 확 달라지니 정말 신나고 행복하다.

 

 

우리도 부동산의 왕이될 수 있다

트럼프만 부동산 재벌일까? 아브라함이 보여준 안목은 또 어떤가? 우리에게도 가능성과 희망이 있다. 노마드 경제학은 부동산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가르쳐 준다. 현실의 눈으로만 살지 말라. 현실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도 말라. 당장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도 말라. 만약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가치가 달라짐을 안다면 오히려 현실을 접고 미래를 향해 눈 뜨는 것이 옳다. 지금의 잣대로 삶을 바라보지 말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땅과 인생이라면 비록 오늘은 척박할지라도 내일 그 땅과 인생의 가치는 바뀌게 될 것이다. 오늘의 악조건도 내일에는 최고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쓰임 받는 날 내 삶은 달라진다. 그날을 주목하라. 그것이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땅이 아니라 땅의 소유권에 대한 것, 나아가 그 땅의 활용계획서였던 것이다. 그는 그 땅의 사용계획서를 이미 알고 있었음으로 부동산 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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