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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행복학교 6 나섬선교훈련소 필리핀 행복학교

나섬선교훈련소 필리핀 행복학교

나는 군종장교가 되기 위하여 경북 영천의 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군종장교 후보생들에게는 훈련소가 별도로 없었기 때문에 군종장교를 비롯한 몇 명의 혼합사관 후보생들을 위한 특별훈련소가 3사관학교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30여 년 전 일이지만 나는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훈련소에서 번호가 1번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모든 훈련 시 가장 먼저 훈련에 뛰어들어야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힘든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훈련이라는 것은 힘들면 힘들수록 유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을 대비한 훈련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한 군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훈련받지 않고는 장교가 될 수 없다. 장교훈련이 사병 훈련보다 강한 것은 장교이기 때문이다. 사병들을 지휘하여야 하는 장교는 사병들보다 강한 군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군종장교라는 특수신분의 군인이었지만 나는 강한 훈련을 받았다. 행군을 한 뒤엔 유격장에서 고된 유격 훈련을 받았다. 사병훈련이 4주인데 반해 장교 훈련은 12주가 넘었고, 후반기에는 육군행정학교에서 4주간의 전문 교육을 더 받았다. 그러고 나서도 일 년에 한 두 번씩은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했고 단기의 짧은 군목생활을 했지만 여러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그때는 피곤하고 힘들어 도망하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분명 필요한 훈련이었음을 느낀다.
강한 군인은 강한 훈련으로부터 만들어진다. 훈련이 혹독하지 않고 강한 군인이 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특전사나 해병대 출신들이 다른 것이다. 강하게 훈련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영적 전쟁을 하는 영적 군인들이다. 육체적 훈련보다 강해야 하는 것이 영적, 정신적인 영역이다. 인간을 강하게 하는 것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적이며 정신적인 부분까지 포함한다. 다시 말하여 전쟁을 위하여 군인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선교사는 영적인 싸움을 위하여 훈련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군인을 만들기 위하여 훈련소가 필요하듯 영적 전쟁을 하여야 하는 선교사를 위해서도 훈련소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나섬의 선교훈련소는 바로 필리핀행복학교다. 행복학교 개교식을 위하여 나섬의 단기 선교팀이 필리핀행복학교를 찾았다. 선교훈련이란 추상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고된 시집살이 같은 것이다. 일단 참여하면 훈련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여야 한다. 누가 시켜서 참여한 것이 아니니 나중에라도 할 말이 없다. 이번 훈련과정에는 산지족 마을과 비하오 아이타 원주민 마을 탐방이 있었다. 
산지족 마을을 가려면 커다란 트럭을 타고 산을 넘어가야 한다. 물 건너고 산 넘어서 찾아가는 산지족 마을 가는 길은 즐겁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온몸에 멍이 드는 혹독한 시간을 거쳐야 한다. 처음에는 좋아서 환호성을 지르고 웃고 떠들지만 곧 후회가 시작된다. 트럭이라야 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없었을 것 같이 낡고 볼품없는 것이다. 그 트럭에 몸을 싣고 산을 기어올라야 한다. 곧 해체될 것 같은 그 트럭이 선교팀을 싣고 헉헉대며 산을 오른다. 물 건너고 골짜기를 지나 기어이 산에 오르면 그곳이 바로 하늘아래 산족 마을이다. 필리핀에 이런 산골마을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지만 그 골짜기 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하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에 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은 진실이다. 
산지족 마을을 다녀온 선교팀은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엉덩이에 멍이 들었다는 용훈이부터 발에 쥐가 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는 이교일 집사, 특전사 출신인 이인희 집사님도 힘든 행군이었다 말한다. 그러나 모두들 표정은 행복하다. 왜 그럴까? 서장로님은 시간이 나는대로 그 산지족 마을에 며칠 동안 머물고 싶다고 한다. 할 수 있으면 아예 집을 구해 살고 싶다 한다. 좋았던 모양이다. 모두들 선교의 의미를 느끼기 시작한 듯하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 산지족 마을을 다녀온 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것은 그만큼 고생했다는 말이다. 고생한 만큼 기억되는 것이 인생이고 훈련소에 대한 기억이니까.

나섬의 선교팀이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잠발레스에 있는 비하오 아이타 원주민 마을이다. 산에 살던 아이타 원주민들은 피나투보 화산폭발로 산아래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만들어진 곳이 비하오 마을이다. 아이타족은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은 원주민이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당시 아이타 원주민들은 거의 동물처럼 취급을 당했다 한다. 지금도 필리핀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다. 처음 그 마을을 찾아갔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아이들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의 마을이다. 집이라야 대나무를 엮어 만든 공간이 고작이었으며, 마치 돼지를 키우던 막사처럼 냄새가 진동하던 처절한 빈민촌 그대로였다. 그 후 몇 번을 다시 방문하면서 한번은 뉴라이프 선교회에서 도서관을 새로 리모델링해 주기도 하였다. 그런대로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행복학교 개교식에 맞추어 다시 비하오를 찾았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작고 귀여운 아이의 촉촉한 손을 잡고 그 아이의 집에 쌀을 가져다주었다. 혹시 제집을 가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을 하는지 아이는 우리가 제집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그리고는 드디어 제집 방바닥에 쌀 한 무더기를 내려놓으니 안심이 되었나보다. 그제야 얼굴의 표정이 밝아진다. 가난한 아이의 삶이 쌀 한 무더기에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제 이름조차도 제대로 쓸 수 없을 것 같이 작은 그 아이에게 가난이 무엇이기에 그날 나누어준 쌀의 의미가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것일까? 그 아이에게 가난은 태어나면서부터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나 보다.
비하오 마을에서의 선교 체험은 충격이었다. 과연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처참해질 수 있는가? 짐승보다 결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에게도 행복이 있고 감사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의외의 모습을 보았다. 비하오 마을의 아이타 아이들에게는 웃음과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이들이야말로 태초의 창조의 정신을 간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 문화에 짓눌린 우리에게 아이타 마을에서의 체험은 그래서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곳이 있었다. 마지막 날 마닐라로 나오면서 들린 빨리빠란이라는 공동체다. 윤봉로 선교사 내외분이 사역하는 빈민촌에 가면서 우리 모두는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마닐라 빈민촌을 옮겨놓은 곳이 이 지역이라 한다. 우리로 말하면 청계천과 중량천 주변의 판자촌을 옮겨놓은 성남과 같은 곳이다. 예전에 성남을 가본 적이 있다. 오래전이니 지금과는 분명 다른 곳이다. 당시엔 서울의 판자촌 사람들을 이주해 놓은 곳이 성남이라 했다. 좁은 골목과 한참이나 올라가야 하는 언덕의 아득한 골목이 기억난다. 그 골목 안에서 놀던 아이들도 생각난다. 내 친구 목사들이 그 성남 빈민촌에서 목회를 했다. 빈민 목회 또는 민중목회라 불렀었다. 지금은 작은 교회라고도 부르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으로 찾아간 내 친구들이 생각난다.

빨리빠란 공동체가 위치한 곳은 필리핀 빈민촌의 원형 그대로를 간직한 곳이다. 동네 주변을 한바퀴 돌며 기도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가서 기도 사역을 하고 돌아온 판가즈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의 삶을 다시 결단하려는 판가즈였다. 인간이 가난하다지만 어떻게 저렇게 가난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그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교회가 존재했다. 그곳이 선교사가 가는 길이다.
그런 곳에서 윤선교사님 내외는 선교를 하고 있었다. 이교일 집사님과 회사 동료였다는 윤선교사는 예수를 믿은 지 불과 2년 만에 선교사로 훌쩍 떠났다 한다. 회사에서 잘나가는 촉망받던 직장인이었음에도 그는 사표를 내던지고 무조건 떠났다 한다. 성경 속의 아브라함이 바로 여기 있었다. 분명 윤선교사는 아브라함의 체험을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성공했다. 아니 성공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출해야 성공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했다는 말은 인간적인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성공은 하나님나라에서 귀히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음으로 성공했다는 말이다. 윤선교사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지만 지금은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음을 느낀다.
한 주간 동안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행복학교 개교와 선교현장을 경험하면서 나와 나섬의 식구들은 잊을 수 없고 감동적인 선교의 일정을 보내었다. 나섬의 외국인 지도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섬의 청년들은 어떤 도전을 받았을까 궁금하다. 나는 필리핀 행복학교를 세우면서 의미있는 선교훈련 캠프를 만들었음에 기쁘게 생각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국교회의 시니어 은퇴자들은 물론이고 선교현장을 체험하면서 선교적 삶을 살려는 모든 이들에게 필리핀 행복학교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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