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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톡70 페러다임의 변화와 나섬공동체 그리고 한국교회의 미래


가. 패러다임의 변화와 출애급

위대함을 원하면 홍해를 건너야 한다. 애급에서 광야로 다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언제나 홍해와 요단강 같은 장애물이 있다. 그런 장애물이 있다고 애급에 머물러 있거나 광야로 나아가는 결단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맛볼 수 없음이 분명하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길일지라도 애급에서 광야로 나아가려는 의지와 도전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개인도 기업도 하나님나라의 운동도 기적을 이루어낼 수 없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마땅히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야 생존하고 쓰임 받을 수 있다. 영원히 갈 것 같았던 대기업도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지 못하여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교회와 선교단체 또한 흔적도 없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필수다. 기적을 원한다면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교회와 목회,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선교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가히 빛의 속도임에도 우리는 아직 변화하지 않거나 변화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가 맞이하는 위기의 원인이다.  
저출산과 초고령의 세상에서 교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 어디에 대안이 있으며 희망이 있는가? 여전히 교권과 교리화된 교회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한국교회에서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콘크리트 건물이 목회의 전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내는 교회와 목회에서 찾아야 한다.
나섬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화두를 끌어안고 사는 공동체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고정관념도 어떤 프레임도 거부하려 했다. 언제나 변화하려 했으며 그 변화가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임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나. 나섬 공동체와 필자

1.최고가 아니라 최초가 되자.

나는 1987년 장신대 신대원을 80기로 졸업한 후 바로 군목으로 입대하여 1990년 7월 전역하기까지 만 40개월을 육군 군목으로 근무하였다. 
전역을 앞두고 고민하던 중 나는 두 가지 목회원칙을 갖게 되었는데, 그 하나가 ‘최초가 되는 인생을 살자’는 것이었다. 아류의 인생을 살기보다는 새로운 길을 내는 창조적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몽골의 울란바타르 외곽에 가면 돌궐족의 장군이었던 돈유쿠크의 비석에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 라는 유명한 유목민의 명제가 쓰여 있다. 나는 그 명제처럼 성안에 머물기 보다는 길을 만들어 내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길을 내는 삶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님을 나중에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감사하게도 내게는 최초의 길이 주어졌다. 1992년 우연히 마주한 외국인 나그네들을 만나 선교적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외국인 나그네를 섬기는 사역을 시작으로 우리 나섬공동체의 모든 사역은 최초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이미 시작한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는 남과 경쟁하거나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며 살았다. 우리는 우리만의 색깔과 철학과 비전으로 살아온 공동체다.


2. 사회적 약자가 필자의 목회 대상

군목을 전역하며 결심한 두 번째 원칙은 내 목회적 영역이 사회적 약자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어둡고도 지독하게 고통스럽던 8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그때부터였을까? 민중이니 해방이니 하는 말을 마치 내 삶을 지배하는 절대가치처럼 여기며 살았다. 그러므로 목회와 신학은 언제나 역사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음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뿐만아니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붕괴가 도미노처럼 이어지던 때에 마치 계획된 것처럼 나는 군목을 전역했으며 그 후로 등장한 세계화라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며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게 되었다. 독일 통일과 소련의 사회주의 포기는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었다.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맺어낼 것이었다.
컴퓨터를 비롯한 정보화 시대와 경계와 국경을 허물고 들어오는 이주민의 시대는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변화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변화가 의미하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며 살아간다. 소위 정보화와 세계화가 그것이다. 그 세계화는 이제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소중한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함부로 취급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그들을 보호하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그들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내게 그들은 운명처럼 다가온 사람들이다. 거부할 수 없었다. 그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축복해 주신다는 하나님 말씀은 현실이 되어 내게 이루어지고 있다. 


3. 광야와 노마드의 신학이 만들어지다.

일반적으로 신학은 너무 사변적이다. 그래서 싫다. 신학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의 신학인 것이다. 그 이야기의 주체는 물론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이야기 하시는 신학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이야기 신학이 출애급 사건이다. 애급에서 광야로 이어지는 이야기, 광야에서 만나지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이야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고 사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 삶의 이야기 신학이다. 그들의 신학은 더 이상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삶에 그대로 투영되는 이야기 신학이다. 광야의 신학은 이야기다. 관념의 신학은 삶의 신학과 어울릴 수 없다. 
애급에 신학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신학의 주체는 바로이며 현실에 안주하는 기득권 신학이고 나아가 그 안에는 어떤 역동성도 존재할 수 없다. 역동성은 홍해를 건너는 순간에 나타나는 에너지다. 하나님은 역동적이며 살아계신 존재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애급에서 광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나님을 만난다는 큰  틀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광야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어떻게 그 척박한 땅에서 살 수 있을지 의심을 품는다. 무섭고 두려운 광야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포기한다.
그러나 분명히 광야에서만 하나님은 만나진다. 광야는 두려운 곳이지만 동시에 은혜의 땅이다. 그 대지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자는 홍해를 건넌 자다. 유목민 노마드 신학이란 그런 거다. 두려운 광야를 선택하고 결단한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신학이다.
나섬의 모든 이들은 유목민이다. 경계를 허물고 국경을 넘어 우리에게 찾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안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성에 머문 이들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나섬의 영성과 나섬의 영역은 모두 유목적이다. 흐르는 물처럼 세상 밖으로 나아가려는 속성이 있다. 
광야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유목민이 되어보는 것도 좋다. 광야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곳에는 기적이 있고 역동성이 있으며 살아계신 자의 은총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은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는 광야의 신학이며 노마드 신학이라 부른다.
   

4. 목회에도 융합과 통합이 필요하다

경계는 이미 허물어졌다. 일반 학문은 물론이고 기업도 산업도 융합이다. 어우러지고 통합되어야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
신학도, 목회도, 선교도 마찬가지다. 융합과 통합의 목회와 선교가 시작되었다. 무궁무진한 창조적 융합이 그 속에서 일어난다. 목회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선교의 패러다임도 변한다. 아니, 변해야 살아남는다.
나섬은 모든 것을 융합한다. 모든 경계를 허물고 받아들이며 섞어 보려한다. 경제와 선교와 목회의 경계선은 이제 무의미하다. 먹고 사는 문제와 하나님 나라의 일이 분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건물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분리되지 않는다. 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일 또한 나누어질 수 없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연동되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 융합의 목회와 선교를 위하여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아간다. 지금 우리 공동체 옥상에는51kw의 햇빛발전소가 세워져 있다. 우리는 이제 햇빛발전소와 도심농업, 버섯재배와 콩나물 재배, 도심양봉과 제빵실까지 운영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사회적 기업은 물론이고 선교적 기업에 대한 비전도 갖고 있다. 이런 모든 영역의 사역이 융합되어 새로운 교육과 창업, 그리고  선교가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목회와 선교, 교육과 경제적 자립, 미래 선교적 기업이 하나로 융합된다. 모든 것에 경계는 없다. 나섬교회와 외국인 나그네를 위한 선교공동체, 재한몽골학교와 햇빛발전소와 빵공장 그 외에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융합하고 섞는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우스를 지향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있어야 한다. 나섬에 들어오면 하나님 나라가 생각나야 한다. 그 모델 하우스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5. 재한몽골학교와 나섬 공동체 그리고 역파송

목회도 선교도 결국 사람을 세우고 회복시키는 일이다. 건물을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나섬의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으로 사람을 교육시키고 보내는 사역이다. 오늘은 나그네이지만 결국 순례자가 되게 하는 것이 선교다. 더 나아가 순례자를 선교사로 보내는 일이 궁극적인 목표다. 나그네가 순례자가 되고 순례자가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재한몽골학교는 1999년 시작되었다. 개교 이래 수백 명의 몽골 학생들이 본교를 거쳐 갔고 졸업을 하였다. 몽골의 미래는 본교 재학생들의 미래와 연결되어있다. 우리학교는 몽골선교의 못자리이며 나아가 세계선교의 베이스캠프다.
나섬공동체에는 6개국 즉 몽골, 인도, 이란, 중국, 필리핀, 베트남 등의 예배공동체가 있다.  각 나라 예배공동체에는 장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현지인 목회자들이 있다. 물론 모든 예배공동체를 지원하고 중보하는 한국인 성도들이 있다.
예배는 모든 공동체의 필수다. 예배는 반드시 드려져야 한다. 그것이 원칙이다. 우리는 선교를 지향한다. 선교는 사람이 살아나는 경험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생물학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문화적이며 전인적인 회복이다. 우리는 그래서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비록 무슬림이라 하더라도 나섬공동체에 들어오는 순간 예외 없이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나머지는 서비스다. 상담이니 진료니 하는 모든 것들은 선택이고, 섬기고 나누는 삶의 일부이다.
역파송은 나섬의 비전이며 현재 진행 중인 사역이다. 현재는 몽골과 터키에 두 명의 현지인 사역자들이 목회자가 되어 역파송 되어 있다. 이번에는 인도 차례, 내년에는 베트남. 그렇게 매년 한명씩 역파송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다보면 전세계에 나섬의 역파송 선교사들이 세워질 것이다. 그들 모두는 현지인들이다. 물론 신학을 공부한 이들이다. 그들은 이미 목회자가 되어 선교사로 보내진 것이다. 나그네로 왔다가 순례자가 되었고 다시 선교사와 목회자로 보내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파송이라 부른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소개하고 싶은 사역이 있다. 시니어 선교다. 우리는 이를 이름하여 ‘뉴라이프 미션’이라 한다. 은퇴이후의 삶은 선교적으로 살아가자는 캠페인으로 시작된 사역이다. 동대문을 땅 끝이라 생각하고 시니어들을 동대문의 몽골과 중앙아시아, 러시아 타운으로 파송하고 있다. 이미 3년 전 동대문에 작게나마 비전 센터를 마련하였고 많은 시니어들이 그곳에서 봉사하며 선교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무척 행복해 한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즈음에 고령자와 이주민, 선교를 융합한 것이다. 그랬더니 전혀 새로운 창조적 선교가 일어나고 있다. ‘뉴라이프 미션’은 시니어들에게 희망을 준다. 뿐만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이주민 나그네들이 위로를 얻는다. 선교는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6.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나의 꿈은 멈추지 않는다. 매일 꿈이 꾸어진다. 창조에 대한 꿈이요 비전이다. 눈은 안보이게 되었지만 내 마음의 눈은 새로움을 본다. 미래가 보인다.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길이 보인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그렇다. 방향이다. 
나는 여전히 성 쌓는 목회가 아니라 길 내는 목회를 하고 싶다. 그래서 죽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라 여기며 죽는 날까지 길을 내고 싶다.
내 꿈은 미션하이웨이로 이어진다. 선교적 길을 만들고 전세계를 나섬의 역파송 선교사들로 네트워크하는 것이다.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기득권을 쌓는 것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 중이다. 언젠가 나도 그 길을 걷는 나그네요, 순례자요, 선교사로 살고 싶다.
(2015-2학기 장신대 신대원 학생 대상 연합강좌 “다양한 목회유형 연구”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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