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에 40일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자 산 아래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야훼라 불렀다. 그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고 예배를 드렸다. 모세는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던 그 시간에 그들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부르며 예배하였다. 산에서 내려와 그 광경을 본 모세는 크게 노하여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부수어 불살라 가루를 만들어 버렸다.
고작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며 예배를 드리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본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상숭배이며 인간이 만든 조작된 신일뿐이다. 우리는 만들어진 신을 신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항상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형상화되며 인간의 욕망을 대신하는 기독교는 마치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부르며 예배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없다. 기복신앙을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오늘의 기독교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독교를 획일화된 이념으로 포장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교회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 금송아지 하나님을 부수어야 한다. 금송아지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에 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은 때로 심판의 징계도 내리시고 위로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조심스럽게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은 고요한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이념과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리도록 우리를 권고하신다. 괴상한 논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하지도 않으시며 망령된 술사들처럼 이상한 말들을 하시지 않는다. 소위 능력의 종이라며 어느 누구에게 그런 딱지를 붙여 주시지도 않는다. 거짓으로 교인들을 속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교회의 행태는 금송아지 하나님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의 전형이다. 이즈음에서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돌아서야 한다. 산에 오른 모세의 심정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려는 신앙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