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복음 13:31-32)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불행하게도 현대인은 불임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규모와 크기 그리고 겉모양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내면의 생명력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많은 공해와 무절제로 인하여 심각한 불임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천국은 마치 사람이 겨자씨를 심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또 그 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일지라도 결국 나물이 아니라 나무가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가지에 깃들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같은 삶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큰 나무가 되고, 새들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라는 말씀 속에 나는 큰 소망과 힘을 얻는다.
이제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나섬공동체의 작은 건물 속에는 진짜 작은 몽골아이들이 뛰어놀고, 공부하고 있다. 몽골 선생님들을 모아놓고 새학기를 시작하며 정말 제대로 공부하고 교육시키자고 부탁을 했다. 누가 이 아이들을 알고 기억이나 하겠는가마는 내겐 큰 꿈이 있다. 비록 오십 명의 작은 몽골학교이지만, 그리고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된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큰 비젼이 있다. 하나님이 그 아이들을 통하여 이루시고자하는 놀라운 꿈이다. 그 꿈은 마치 작은 겨자씨의 꿈과 같다. 지금은 지극히 작은 아이들이며 학교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큰 나무가 되고 수많은 새들의 보금자리와 기대 언덕이 될 것이라는 꿈이다.
낯선 이국땅의 나그네로 찾아와 아무 의지할 곳 없이 가난과 문화적 이질감 그리고 열등감속에 살아온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에게 사람들은 무관심하고 오히려 이방인의 꼬리표를 달아 그들을 멀리한다. 아이들은 이미 겨자씨가 되었고, 그런 겨자씨 취급을 받는다. 한국말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당황하는 표정들 속에 작은 자들의 그늘이 숨겨져 있다. 한국 아이들이 과외와 학원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우리 아이들은 초원의 말을 생각한다. 그 초원에서 한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달렸던 몽골에서의 삶을 그리워한다.
부모가 공장에 가면 갈 곳 없어 방황하던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왜 엄마 아빠가 한국에 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면서 스스로 작아진다. 자꾸만 초원에서의 삶이 그리워지고 그래서 무척이나 고향이 그립다. 이름을 한국 이름으로 바꾸어 보고, 한국 아이들처럼 핸드폰에 한국 노래를 배워 불러보지만 결국 자신은 몽골 아이라는 사실 앞에선 여전히 작아진다.
어느 날 아이들의 예배 시간에 ‘하나님, 우리가 커서 몽골의 지도자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날 나는 그 아이와 똑같은 기도를 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작은 겨자씨 같은 몽골 아이들을 큰 나무가 되게 하시고, 그 숲 안에 몽골의 영혼들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길 기도했다. 그로부터 나는 이 작은 겨자씨의 꿈을 품었다. 학교를 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그 꿈은 내 삶의 생명처럼 나를 끌어갔다. 그 작은 겨자씨의 비젼 앞에 이 세상의 어떤 고통도 더 이상 고통일 수 없다. 비젼은 나와 우리 나섬공동체를 이끌어간다.
이제 서서히 심어놓은 작은 겨자씨에서 싹이 나려나보다. 이 봄이 아마 그런 소망을 갖게 하는 계절이 될 것 같다. 아직은 작고 여린 싹이지만 그러나 나물은 아니다. 나물보다 작은 싹이지만 그 속엔 나무의 생명력과 유전자를 잉태하고 있다. 그리고 큰 나무가 될 것이다. 수많은 인생들이 찾아와 깃들일 큰 나무 말이다. 이 아이들 속에 그렇게 큰 천국의 비젼이 있다. 천국을 잉태한 아이들이다. 몽골을 천국으로 만들고 이끌어갈 그런 생명력이 있는 아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