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놀음에서 자유하라>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하롯샘 곁에 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것 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각각 그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명은 머물러 두니라 미디안 진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 있었더라 (사사기 7:1~8)
“몇 명이나 모이지요?” “외국인근로자요?” “아니요. 한국인 교인들이요” “한국인 교인들은... 몇 명 안되는 데요. 그 대신 외국인들은 많아요”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난감하다. 무어라 대답할 말을 딱히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인수가 몇 명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교인수가 곧 그 교회와 목회자의 능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몇 명이냐에 따라 그 교회의 예산을 추론하기도 한다. 대충 한 사람의 교인 수에 곱하기 150만원 쯤 이라던가?
그런데 이런 계산법이 우리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계산을 하여야 한다. 교인이 많으면 그것은 그 교회의 힘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는 힘이 아니라 짐이다. 한국교인이 아니라 외국인근로자 교인이기 때문이다. 헌금 내는 교인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거의 이천 명 정도 되요” “와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네요” “네, 큰 교회이지요. 그런데 전부 외국인근로자들이예요” “... ... ”
그 쯤 되면 눈을 아래로 깔고 내려다본다. 씁쓸한 웃음과 함께. 나는 언제나 그렇게 대접받았다. 내가 하는 사역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몇 명의 교인수를 가진 교회의 목사인가에 따라 철저히 그 만큼 대접받았다.
돈이 없어 떡볶이를 팔러 갔다가 거렁뱅이에게 동냥 던져주듯이 내던져주는 돈을 받아나서는 순간 속에서는 울컥 눈물이 났고, 뒤에서는 다시 돌아서 욕이라도 하고 싶었을 만큼 속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동기들 목사 만나면 교회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자랑하는 소리 때문에 그런 자리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모두가 내 콤플렉스다. 열등하고 빈약해진 나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생겼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젠 그런 만남이 싫고 조용히 내 목회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다. 몇 명의 교인을 목회하느냐고 묻는 자리에는 가지 않을 참이다. 그냥 이렇게 나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폐아처럼 나는 외국인근로자선교라는 제한된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이 비주류의 목회지가 좋기 때문이다. 더러운 경쟁과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그 숫자놀음의 천박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목회지이기 때문이다. 교인수와 돈을 수도 없이 세면서 목회하는 그 자리가 아닌, 내게 찾아온 나그네들에게 그저 줄 수 있는 자리에 있음이 좋아서이다.
내가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얼마 전 있었던 우리 나섬교회 총 전도주일을 경험하고서이다. 올해 들어서 우리 나섬교회 교인들에게 전도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정말 나도 이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교회를 지금보다는 조금 더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야 없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그 방법이 왠지 석연치 않은 것이었다. 교인들에게 전도를 강요하다시피하면서 자꾸만 전에 없던 속앓이를 하였다.
‘그냥 주어진 만큼 목회하면 되는데... 괜히 내가 조급증을 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 목회철학이 이런 것이 아닌데’ 하는 자괴감도 들면서 나는 괴로워했었다. 정말 이렇게 목회하려 했다면 이것은 정말 내 자신에 대한 모순이다. 당당하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그리고 작은 교회를 더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교회 교인들 빼앗아오는 목회가 아닌 나만의 영역을 찾아나서는 블루오션의 목회를 하려했는데... 어느 새 나는 주류교회의 교인 쟁탈전에 뛰어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 이상 이렇게 해서 교회를 키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하면서 이젠 교인의 숫자에 연연해하는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다.
내가 ‘나섬교회’ 목회를 시작한 것은 외로워서였다. 그리고 한국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자립을 위하여 선택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언제까지 여기저기 앵벌이를 하면서 거지 동냥 얻으러 다니듯이 모금하러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자생하고 싶었다. 우리 스스로의 공동체 안에서 모든 재정과 일꾼을 조달하고 싶어서 시작한 목회다. 막상 나섬교회를 시작하니 현실이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한국교인들에게 우리 나섬교회를 알리는 일에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교회가 외국인들만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는 외국인근로자들만 모이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한 것이었다. 이미 고착된 이미지를 극복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에게 우리 나섬교회에도 한국인 교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섬교회를 시작했다. 그것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광야에 홀로 있는 고독한 사역자에게 한국인 교인들은 힘이 되었다. 나는 그런 교인들이 필요했다. 함께 기쁨과 고난을 나눌 교인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역에 필요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립 자생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했다. 그것이 나섬교회다. 나는 나섬교회를 그런 이유로 목회하기로 했던 것이다. 당장은 힘이 들었지만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현실이다. 나섬교회는 또 하나의 교회일까 아니면 유일한 교회일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많은 교회 중 하나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내게 나섬교회는 다른 교회와는 다른 철학과 의미가 있는 교회이기를 바랐다. 한국인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이지만 전혀 다른 목표와 비젼을 가진 그런 교회이기를 바랐다. 다른 비젼이기에 다른 목회철학과 전력을 가진 그런 교회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자꾸만 기성교회의 모습을 닮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고민이었다. 어느 날 차라리 이런 목회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다른 목회를 하고 싶다. 다른 사람이 했던 길을 가고 싶지 않다. 그들이 성장한 교회의 모델을 따라 나도 그렇게 성장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지금의 교인에 만족하고 살지언정 그런 숫자놀음의 목회는 하고 싶지 않다.
어느 날 내게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에 대한 말씀이 생각났다. 삼만 이천 명의 군사를 삼백으로 줄이신 하나님의 뜻을 새겨보았다. 우리이겐 삼백 명도 많다. 교인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이며 비젼이다. 숫자 놀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적어도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이다. 많아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우시고 공급하신다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다.
그랬다. 우리 나섬교회가 커야 우리 공동체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작아도 우리가 하고자하면 하나님은 나머지를 책임지신다. 내가 하는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다는 선교에 대한 믿음이 진짜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인 것이다.
교회를 키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이제부터 우리 교회는 총동원 전도주일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 억지로 다른 교회 교인들 끌고 오는 도적질 목회는 하지 않는다. 도적질하고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목회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교회의 교인수가 줄었다. 지난 2006년 5월 25일 발표된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2005년 11월 1일 현재 한국교회 교인수는 약 862만 명으로 보고 되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한국교회의 교인수가 천만 명을 넘는다고 말해왔는데 이 통계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교인수가 늘어나기는커녕 교인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카톨릭은 어떤가? 1985년 이후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이 대거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106만 명의 교인이 늘었다. 통계에 의하면 카톨릭은 515만 명의 교인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 개신교외 그 숫자에 비교할 수 없었을 만큼 미약했던 카톨릭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교인들을 동원하여 아파트마다 돌아다니고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특공대와 전도폭발과 같은 엄청나고 무시무시한 전도전쟁을 하고 있던 때에, 카톨릭은 무엇을 했기에 그렇게 놀라운 결과를 얻어낸 것일까? 전도지 한 장 돌리지 않은 카톨릭은 그렇게 성장하고, 매일 전도를 위하여 올인한 개신교는 오히려 그 숫자가 줄었으니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더 부끄러운 것은 그렇게 교인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통계에도 불구하고 몇몇 교회는 성장하고 있다고, 몇 만 명의 교인이 모이고 있다고 자랑하는 그 꼴불견이다. 교인이 줄었는데, 왜 그 대형교회는 더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교인들은 도대체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들인가? 아니면 땅에서 솟아난 교인들인가?
전체 한국교회 교인은 줄고, 반면에 대형교회 교인은 급속도로 늘어나고... 이러한 아이러니는 한국교회의 불행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보여준 숫자놀음의 허수다. 그 해 한국교회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교인수가 1300만 명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그렇다면 같은 2005년 한해에 통계청의 통계와 한국교회의 자체적 통계가 왜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일까? 거의 수백만 명씩이나 한해에 교회에서 이탈하고 떠나고 다른 종교로 옮기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이것은 우리 교회의 숫자놀음의 허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다.
숫자놀음의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국교회가 산다. 교인 수 자랑하는 목회에서 벗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인수와 재정의 규모로 성공과 자랑거리를 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국교회가 성숙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교인 수는 줄던말던 자기교회만 성장하고 채우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목회에서 벗어나야 한국교회가 산다. 목사의 성공지향적인 목회철학이 사라져야 한국교회의 미래가 있다.
어제 우리 교회에 성엽이라는 심각한 근무력증으로 고통받는 아이가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전동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사는 아이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이다. 교회에는 처음 찾아왔다는 성엽이를 안고 기도를 했다.
“주님, 우리 교회에 성엽이 처럼 고통받는 아이들이 찾아오게 하옵소서”
숫자가 아니라 철학이다. 그것이 필요한 교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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