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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노마디즘(Nomadism)과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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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키스칸과 바울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가서, 무시아 가까이 이르러서,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여기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6-10

지난 천 년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칭키스칸이라는 미국의 유력 언론사의 발표가 있었다. 지난 천 년 동안 수많은 인간들 중 칭키스칸이 일등이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난 두 천년동안에는 누가 일등이었을까? 나는 예수는 예외로 하고 뽑는다면 서슴없이 바울이 일등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바울로부터 전파되기 시작한 기독교 복음은 전 세계를 파고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상과 철학도 바울이 전한 복음보다 강력하지는 못했다. 바울은 죽었지만 바울의 비젼과 믿음은 여전히 살아있어 지금도 그 운동력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칭키스칸은 1206년 몽골제국을 세웠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정확히 800년 전이다. 칭키스칸의 제국은 그 후 약 3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고,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였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지배하지 못한 땅이며, 제국이었다. 그러나 그의 몽골제국은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를 기억하고는 있으나 그의 제국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영웅으로 끝난 것일까? 

요즘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는 몽골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였던 칭키스칸에 대한 관심이며, 더 나아가 본질적으로는 유목주의(Nomadism)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전 세계는 급속도로 노마드적 삶의 양태로 변화되고 있다. 즉 유목적 삶의 양태는 21세기 문명의 코드이며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노마드적 삶은 적어도 오늘날의 디지털 문명과 비교될 수 있다. 속도와 적응력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식 삶의 문화와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칭키스칸을 비롯한 유목제국은 작은 조랑말을 타고 온 세계를 지배했다. 그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속도와 제국의 땅의 넓이는 비례했다. 칭키스칸의 유목주의는 오늘날 디지털 문명을 상상하게 하는 상징적 삶의 양태이다. 새로운 디지털 문명은 유목주의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유목주의는 칭키스칸의 몽골제국 이전에 바울의 선교사역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나는 그것이 바울이 칭키스칸보다 더 위대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칭키스칸은 조랑말과 칼로 전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지만, 바울은 복음으로 전 세계를 변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바울은 칭키스칸보다 1000년이나 빠르게 복음을 증거하는 유목적 삶을 살았던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모두 유목적 삶으로 세계사의 한 꼭짓점을 이룬 위대한 
사람들이다. 인류의 문명과 기술 그리고 복음은 그런 유목적 삶을 가진 사람
들에 의하여 전파되고 발전하였다. 

외국인근로자들은 유목적 삶을 살려고 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전 세계는 국경이 없는 세계화의 시대로 급속도로 전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보화 시대로 바뀌고 있다. 이 두 축, 즉 세계화와 정보화는 유목적 삶을 현대인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적 삶의 양태는 인류의 문화와 기술을 견인하였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으며, 우리의 미래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함축하는 것이다. 노마드적 삶은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노마드들의 수평적 삶, 즉 이동하고 새로운 질서와 문화를 창출하려는 욕구를 통하여 선교하시고, 자신의 뜻을 펼치셨다. 바울은 그런 노마드들 중 가장 확실한 노마드였다. 그는 예루살렘 중심의 현실안주적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땅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갔다. 아무도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바울은 달랐다. 그의 영혼과 삶 속에는 노마드적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 있었다. 그는 한 곳에 정착하거나 안주하지 않았다. 기득권을 누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얼마든지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계급이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그 기득권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서신에서 그가 가졌던 기득권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그는 노마드적 삶의 에너지로 가득한 인생을 살았다. 

오직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에게 오늘은 잠시 있다가 떠날 정거장에 불과했다. 다 이루었다는 고백은 예수 한 분뿐이다. 바울은 결코 자신이 다 이루었다거나 모든 것을 완성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푯대만을 향해 가는 노마드일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떠났고, 버렸다. 교회를 세워도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거나 주장하지 않았다. 세습은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다. 헌금을 거두어도 그것이 자신의 업적으로, 교회를 사유화하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았다. 그는 철저한 노마드였다. 유목적 삶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떠나는 비젼을 갖고 있었다. 

비젼은 노마드의 가장 확실한 특징이다. 노마드는 비젼을 품고 산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만드는 비젼이다. 새로운 땅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인생을 산다. 그것이 노마드적 삶의 비젼이다. 
바울은 그런 비젼으로 가득 찬 노마드였다. 그가 마게도니아로 떠날 것을 결심한 것은 그가 그런 비젼있는 노마드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에서 죽음으로 그 노마드적 삶을 완성했다. 굳이 가라고 하는 이가 없었음에도 바울은 스스로 로마를 찾아갔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예수처럼 그는 언제나 노마드적 영혼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애썼다. 내가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바로 그가 그런 노마드적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선교는 노마드적 인간들에 의하여 진행된다. 노마드적 영혼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유목하는 인간, 노마드적 인간은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어도 그들이 갔던 노마드적 삶은 남는다. 

새로운 시대는 노마드들의 시대이다. 노마드적 삶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다. 기존질서에 안주하고 기득권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천박한 자본주의자들은 미래에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은 잠시 평안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책에는 노마드들의 이름만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마드적 인간에게 주목하라. 그들이 바로 외국인근로자들이며, 그들의 자녀이다. 그들은 전달자이며 동시에 정복자이다. 그들은 복음을 전달하며 복음으로 정복할 자들이다. 노마드는 위대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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