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꿈을 꾸었다. 그 꿈은 한번만 꾼 것이 아니라 그 후로도 여러 번 비슷한 꿈을 꾸었다. 나는 이제 두 가지의 꿈 이야기를 할 것이다. 너무도 생생하게 나타난 꿈이었기에 잊을 수 없어 꿈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꿈 이야기 하나>
내가 꿈에 보니 큰 세계 지도가 널브러져 있다. 굉장히 큰 지도다. 사람이 그 지도에서 왔다갔다 한다. 그러다 어느 곳에선가 사람들이 뚜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 땅에 선다. 처음에 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그 얼굴이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터키의 세미가 나타난다. 흑해 주변의 본도 지방에서 온 세미의 모습은 마치 바울을 보는 것처럼 황홀했다. 잘 생긴 세미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이다. 완벽주의자 세미의 모습은 정말 뚜렷하게 내게 전해져온다. 그는 그곳에서 모슬렘권 선교의 중심적 인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음성과 함께 다가온다.
내가 세미를 보니 가슴에서 큰 감동이 인다. 내가 기다린 사람이 바로 이 친구였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비젼의 마지막 거점이 터키다. 우리는 그 터키를 놓고 기도하던 중이었다. 누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역 실크로드 선교의 마지막 주자가 될 것인가를 놓고서 말이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로 넘어가 지금의 세계 선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이제는 역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선교사가 필요하다. 21세기의 바울이 세미다. 나는 그날 꿈을 통하여 분명히 그 비젼을 보았다.
그런데 그 세미 옆에 또 다른 우리 식구가 서 있다. 바로 호잣트다. 호잣트가 세미와 더불어 터키와 이란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닌가! 호잣트가 어디로 갈 것인지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느낌이 들었다.
호잣트는 우리 공동체 외국인 신학생들 중 가장 큰 형이다. 세미가 막내라면 호잣트는 큰 형인 것이다. 동생들을 아우르는 리더쉽이 참으로 보기 좋다. 언제나 웃는 얼굴의 호잣트다. 내가 설교하는 시간이면 가장 큰 소리로 '아멘!'하며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다. 사람을 기분좋게 하는 능력이 있는 호잣트다. 잘 생긴 아브라함 같은 호잣트가 세미와 더불어 모슬렘 선교의 지도자가될 것이라는 비젼이다. 나는 그 꿈을 믿는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이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 동쪽으로 내려가니 인도다. 히말라야가 보이고 그 산 아랫녁에 빵가지가 서 있다. 내 사랑하는 영적 아들이다. 실크로드의 중간에서 조금 남쪽에 위치한 곳에 빵가지가 서 있었다. 그곳도 실크로드다. 복음이 드나드는 모든 곳이 실크로드다. 실크로드가 어디 제한된 공간이랴? 아니다. 노마드들이 오고가는 공간이라면 모두가 실크로드이다. 노마드들이 드나드는 모든 곳이 실크로드인 셈이다.
빵가지는 세계적인 선교사가 될 것이다. 인도 선교는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그는 한국 선교사가 될지도 모른다. 정말 그는 그럴 가능성이 높은 친구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가히 천재적이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능력이 그에게 있다. 우리 공동체에서 실시하는 다문화 이해교육의 강사들 중 가장 인기있는 강사가 빵가지이다. 어쩌면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란다. 나는 그것을 상상할 수 있다. 빵가지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이다. 그런 빵가지가 인도의 히말라야를 중심으로 서 있었다. 인도의 오바마를 안고서 말이다. 그에게는 이제 새로운 가족이 출생할 예정이다. 그의 아내 혜정 전도사가 아이를 임신했고, 나는 그들의 새생명에게 오바마라는 태명을 지어 주었다. 빵가지는 자기의 아이 오바마를 안고서 인도의 히말라야 아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큰 비젼 그 자체였다.
그리고 또 꿈에 보니 중국 동쪽 끝자락에 작은 여자 하나가 서 있다. 두만강변과 맞닿은 도문이다. 그곳에 김이화 자매가 있다. 작지만 큰 꿈을 간직한 소녀같은 자매다. 나는 그 두만강을 넘어 북녘 땅을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을 상상한다.
북한은 땅끝이다. 누구를 그 땅끝으로 보낼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그곳에 갈 수 없다. 하나님이 지명하신 사람만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땅끝의 선교사
가 바로 조선족 이화 자매라고 확신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보내진 사람이다. 이미 호주에서 불법체류의 아픔을 갖고 살았다. 나그네로서의 아픔과 시련을 이미 경험한 것이다. 빌라우드의 외국인 보호소에서 주님을 만나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작지만 그 마음은 큰 자매다. 언제나 여유롭고 하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고백한다. 나는 언재부터인지 하나님이 그녀를 통하여 북녘의 마지막 땅끝 선교를 하실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은 그 희망이 허황된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지금 장로회신학대학 신대원에 재학 중이다. 주님은 그녀를 통하여 땅끝의 선교를 하실 것이다. 그녀는 중국과 북한을 아우르는 선교사가 될 것이다.
또다시 꿈에 보니 몽골 땅에 걸쳐 앉은 츄카와 보르마가 보인다. 그리고 그들을 뒤이어 아짜야 같은 형제들이 줄을 서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몽골인들이 우리 공동체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신학을 하고 다시 몽골로 돌아가는 역파송 선교사로 쓰임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몽골은 세계선교의 지도를 바꿀 수 있는 나라다. 전세계에서 제국을 만들어본 나라가 몇 나라인가? 그들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한 경험이 있다. 칭키스칸의 리더쉽은 지금도 21세기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리더쉽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말을 타고 칼과 화살만으로 전세계를 지배한 민족이다
지금은 작은 민족으로 전락했지만 그들에게는 아직도 제국에 대한 자부심과 칭키스칸의 후예라는 자존심이 남아있다. 하나님은 왜 이 시점에 몽골인들을 우리 한국교회에 그렇게도 많이 보내주시는 것일까? 13세기 인류 최초의 유목제국을 세웠던 저들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일까? 이제 그 경험이 무엇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나는 환상 가운데 주님의 뜻을 보았다. 몽골을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 삼으라는 것이다. 몽골이 세계선교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몽골은 세계선교의 전략적 거점이다. 몽골을 딛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몽골을 품어야 그 다음이 열린다는 것이다. 몽골은 영적인 전쟁터이며 모든 종교가 뒤엉켜 싸우는 선교의 전쟁터이다.
이미 13세기에도 몽골은 그러했다. 칭키스칸의 종교정책은 언제나 포용이다. 그들은 결코 종교의 문제에 개입하거나 어느 한쪽 편에 서는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모든 종교에 대하여 열린 사고와 정책을 갖고 있었다. 불교, 도교, 유교, 모슬렘,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동방 기독교였던 네스토리안들까지 칭키스칸의 제국안에서는 모두가 용납되었다.
그리고 그 종교들은 함께 공존하면서 존재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함께 공존하는 그 상황이다. 언제나 영적인 지도력이 문제다. 누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만약 그 때에 동방 기독교였던 네스토리우스 종파가 승리했었다면 동방교회의 전승은 엄청난 것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동방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혼합주의로 인하여 붕괴되고 말았다.
칭키스칸의 며느리 중 한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에 기독교의 영적인 지도력이 제국 안에서 올바르게 세워지기만 했었더라면 세계선교의 지도는 분명히 바뀌었을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영적인 것이다. 누가 영적인 지도력을 갖게 되는가가 그 시대와 상황을 결정하는 것이다. 동방 기독교가 혼합주의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로마를 통하여 세계선교의 지도를 만드셨던 것처럼 칭키스칸의 제국을 통하여 세계선교의 지도를 새롭게 그리셨을 것이다. 그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혼합주의로 빠져들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사단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몽골은 이미 영적인 전쟁터였으며, 지금 다시 그러한 세계선교의 판을 다시 읽어내는 기준점이 되고 있다. 13세기에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계획이 21세기에 다시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전이다. 우리에게 쵸카와 보르마를 보내주신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도전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섭리이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보내질 것이다. 우리에게 다문화 이주자로 보내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적인 지도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역으로 그들의 민족과 열방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 나는 그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비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도전이며 비젼이다. 칭키스칸의 시대에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훈련소이자 파송국이다. 우리에게서 선교와 영적인 치열함을 배우고 돌아가라는 것이다.
<꿈 이야기 둘>
이 꿈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세상일까? 검은 흙탕물이 흐르는 뻘이었다. 시궁창 냄새도 났다.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 곳이다. 그랬다. 거의가 아니고 아예 사람이 없었다. 그것도 블루오션 중 하나인가?
하수구같은 곳이었다. 그 근처에만 가도 냄새가 난다고 사람들은 그곳을 돌아서 다닌다. 나 혼자만이 그곳에 있었다. 버려진 땅이며 버려진 공간이다.
그런데 이 무슨 대박인가? 검은 시궁창에서 번쩍이는 무엇인가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수도 없이 박혀있는 동전들이다. 겉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니 정말 동전이다. 십원짜리에서부터 백원, 오백원짜리 동전이 검은 흙속에 가득 채워져있는 것이 아닌가?
나 혼자서 동전을 줍기 시작한다. 조금 냄새는 나고 손에 묻는 검은 무엇인가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다. 나 혼자다. 수없이 박힌 동전들이다. 여기저기 백원짜리들이다. 그 옆에는 오백원짜리다. 십원짜리는 부지기수이다. 한참을 줍고 보니 들 수도 없을 만큼 많다. 그래도 끝이 아니었다. 엄청난 동전들이다. 비록 천원, 만원짜리 지폐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가? 동전도 돈이다. 동전도 많이 모이면 큰 돈이다. 동전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줍고 또 주워도 끝이 없는 동전들이다. 나는 이렇게 많은 동전을 본적이 없다. 온통 동전 밭이다. 나는 그곳에서 홀로 동전을 주웠다. 나 혼자 짊어지기에도 많은 동전들을 주웠다. 모두가 돈이다. 가치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는 돈이다.
이 꿈을 꾸고 나는 한참이나 혼자 생각했다. 고독하지만 이 길은 주님이 주신 길이다. 거스를 수 없는 선교와 목회지이다.
내 삶은 고독하고 고통스럽다. 눈의 시력은 이미 사라졌고 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오직 보는 것이라면 꿈이며 비젼이다. 육신의 눈은 사라졌고, 내 마음과 영혼의 눈만이 남았다. 그것으로 세상과 나를 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보고 싶다. 주님은 그것을 보라고 육신의 눈은 멀게 하신 것이다. 고통을 통하여 고통받는 자들을 보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고독함을 통하여 고독한 자들의 영혼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동전 줍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동전 같은 영혼들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가치가 충분하기에 마지막 버려진 사람들에게 가라는 것이다. 나 홀로 그렇게도 가기 싫어 버티었던 나를 끌고 그곳에 던져버리신 것이다. 그런데 그곳이 대박지이다. 내 눈은 멀었지만 그럼에도 나그네 섬기며 대박 맞은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역사는 그것을 증거한다. 성서는 그것을 말하려고 쓰여졌다. 누구에게나 꿈은 현실이 된다. 문제는 꿈꾸는 것이다. 비젼을 품는 것이다. 내 상황과 조건은 최악이지만 꿈은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존재하게 함으로 아직 나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꿈이 이루어진다면 지금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꿈꾸는 요셉처럼 나는 그렇게 세상을 산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눈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을 씹으며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내 삶의 고통과 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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