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신학과 나섬
<분명히 길은 있다>
몽골의 울란바타르에서 북쪽 홉스골로 가는 길은 여간 복잡하지 않다. 먼저 비행기를 타고 무릉이라는 작은 도시에까지 날아가야 하고, 그곳에서 다시 지프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로 서너 시간을 달려야 한다. 그리고는 몽골의 유일한 배를 타고 홉스골 호수 건너 우리가 가려는 곳까지 한 시간 반을 가야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러니 비행기, 지프차, 배까지... 육해공군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우리가 가려는 홉스골 호숫가의 아름다운 게르촌까지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벌써 홉스골에 서너번이나 다녀왔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가본 적이 없으니 이 방법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 과장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어떤 기회에 또다시 홉스골을 가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나에게 흔한 말로 관광은 무슨 재미로 하느냐고 묻겠지만 나는 보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느끼려고 간다고 하면 서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여행을 느낌으로 한다는 말은 참 좋은 말인 듯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내가 몽골을 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몽골을 소개하기 위해 그들의 가이더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장님이 장님을 인도 하는 격이 아닌가?
눈이 보이지 않는 가이더를 본적이 있는가? 나도 본적이 없다. 이것도 최초다. 시각장애1급 가이더 1호가 바로 나인 셈이다.
시각장애를 가진 가이더가 수십 명의 중요한 분들을 모시고 몽골의 홉스골로 여행을 떠났다. 몽골의 국내선 비행기는 무척이나 재미가 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처음 몽골에서 국내선을 타던 기억은 지울 수가 없다. 비행기 좌석에 입석이 있었다. 이것은 몽골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이다. 그 전날 비행기가 뜨지 않았다며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급기야 비행기 좌석은 먼저 타는 사람의 몫이다. 누가 먼저 오르느냐에 따라 그것으로 좌석이 결정되는 것이다. 정말로 놀라운 나라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이야기로 돌아간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기내에서 어떤 집사님 하시는 말씀이다.
"목사님, 초원에도 길이 있네요.”
망망한 초원에도 길이 있다는 말에 나도 궁금했다. 길이 있는 초원이 보고 싶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초원의 길을 볼 수 없다. 그렇다. 내가 볼 수 없는 것일뿐, 분명히 초원에도 길은 존재한다. 수많은 유목민이 양떼를 이끌고 다녔을 길은 있다. 아무리 초원이라 해도 작은 길이라도 있음이 분명하다.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그 황량한 초원에도 길은 존재한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가지만 사실은 저 초원을 달려야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정석이다. 급하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우리는 비행기를 이용하고 있는 것 뿐이다.
몽골의 초원은 남북이 1,500km, 동서가 3,000km이다. 그렇게 넓고 광활한 몽골초원에도 길은 존재한다. 수 천 년 동안 살았을 유목민의 흔적은 오직 그 초원에 남아있는 희미한 길뿐이다. 역시 길을 만드는 민족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그 길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렇게 높이 올라가야 제대로 찾아진다. 한눈에 초원을 보면서 그 안에 숨겨진 길을 찾는 것이다. 길은 눈앞에 있지만 그 길을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큰 대로를 찾는 것이야 간단하지만 작은 길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초지로 바뀌었을 길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임은 당연하다. 사람이 다니지 않으니 길이 사라지기도 한다. 길은 있지만 그 길을 다니지 않으니 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길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이 다녔을 길일지 아니면 동물이 다녔을 길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길은 존재한다.
언젠가 홉스골에서 다시 울란바타르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현지 가이더가 하는 말이 배를 타지 말고 지프차로 이동하자는 것이다. 나는 배만타고 갈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차로 가보자는 제안에 동의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나 험하고 어려운 길이었던지... 함께 여행하시던 장로님 내외분이 난리가 났다. 권사님의 허리가 아파서 큰 일이 난 것이다. 길이 험하니 차가 우리 일행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위 아래로 튀어 오른다. 길은 길인데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은 길이니 중간 중간 나무가 쓰러져 있다. 나무를 치우고 다시 차가 움직인다. 정말 대단한 체험이다. 길을 간다는 것이 이렇다. 산다는 것이 이렇다. 길은 존재하지만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후로 나는 홉스골에 갈 때마다 그 험한 길을 이용한다. 내가 자주 다녀야 그 길이 다른 사람에게 용이할 것 같은 사명감 같은 것 때문이다. 오래전 유목민들은 그 길을 말을 타고 다녔을 것이다. 지금처럼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이용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다. 그 길을 내어야 했던 사람들의 거룩한 길을 나는 지금 비행기 안에서 혹은 조금은 불편하지만 비포장의 지프차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나섬공동체의 미래에 분명히 길은 존재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 길을 찾아가고 있다. 어떻게 이 공동체를 이끌고 가야하는지를 놓고 그 길을 찾는다. 당장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나는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분명히 우리가 가야할 곳에 이르는 길은 존재한다.
<길이 없으면 길을 내라>
비가 오는 어느 날 몽골 초원을 가다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또 얼마나 황당하던지...
길을 내며 달리는 차를 타는 기분은 어떨까? 몽골의 운전사는 모두가 최초의 길을 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간 길을 가지 않는다. 정말 놀라운 발견이다.
갑자기 물이 불어나 길이 없어져도 상관이 없다. 길이 패여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들은 걱정이 없다. 길은 내면 되는 것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면서 가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길을 내겠다는 의지가 없음이 아닌가?
몽골의 운전기사는 길을 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들은 언제나 길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가는 곳이 길이며 그 길은 언제나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하긴 길을 내는 민족이니 길이 두려울 것은 없다.
갑자기 불어난 광야의 강 물 앞에서도 그들은 의연하다. 어떤 장애물도 그저 눈만 깜빡거리며 쳐다본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다른 길을 만든다. 우리 모두는 조용하다 못해 긴장한다. '저 사람이 왜 저러나?'
나는 우연히 그의 눈빛을 보았다. 눈이 안보이는 내가 본다고? 그렇다. 나는 그 눈빛을 보았다. 아니 느끼다 못해 감동을 받는다. 길을 만드는 사람의 눈빛이다. 결코 현실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유목민의 치열함이다.
유목민은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내가 유목민 노마드를 사랑하고 배우려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런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길이 인생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준 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개척하고 창조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나섬의 사회적 기업은 새로운 길을 내는 21세기 목회의 패러다임을 꿈꾼다. 수동적인 선교공동체가 아닌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모델을 만드는 꿈이다. 우리는 돈으로 선교를 하지 않고 기업으로 선교를 할 것이다. 이것이 꿈이다. 돈을 모아서 하는 선교가 아니라 돈을 벌어서 하는 비전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용의 기회를 제공하며 필요한 선교재정을 자급할 수 있는 기업을 상상한다.
전세계에 자국의 선교사를 역파송함에 있어서도 재정의 문제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실험적인 선교적 기업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꿈이다 돈을 보내는 선교에서 생산적인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줌으로써 자생력을 갖는 선교사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내야 한다. 우리의 꿈은 길을 내는 꿈이며 반드시 그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나섬이 사는 법>
예수는 스스로 자신이 길이라고 하셨다. 다른 길이 없으니 스스로 길을 내신 것이다. 나는 그 예수의 선언에 감동과 은혜를 받는다. 우리가 길이어야 한다. 선교의 길이며 사랑의 길이고 하늘에까지 우리 이웃이 우리를 밟고 가도록 길이 되어야 한다.
모슬렘들에게 복음의 길이고, 힌두교도들에게 사랑의 길이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이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길이어야 한다. 예수가 큰 길이라면 우리는 작은 오솔길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섬은 길이다. 나섬의 가족은 그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나섬은 유목민이다. 나섬은 결코 현실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나섬의 길은 험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길은 행복을 만드는 길이며 세상의 평화를 만드는 길이다. 그 길 위에 함께 가는 자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외롭지 않게 길동무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친구가 아니어도 마음 맞는 몇 명의 친구만이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지금 나섬은 사회적 기업의 길을 만든다. 지금은 대안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분명히 길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니 길이 없다면 우리가 스스로 그 길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유목민처럼 우리도 그런 유목민의 삶을 배우면서 길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 길을 만들어야 다른 사람들이 따라 올 것이다. 우리가 길이어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밟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끝이 난다고 해도 후회는 없다. 어차피 다 만들 수 없는 길이다. 작은 골목길이라도 만들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다하여 만든 길이니 좁은 길이면 어떠랴?
성 쌓는 목회가 아니라 길을 내는 목회자로 살아가고 싶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그네로 왔다가 나그네로 가는 삶이다. 다른 사람이 가지 못한 길을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흥분이다. 기가막힌 모험이며 여행이다. 그 깊이와 즐거움을 누가 알겠는가? 가보고 경험한 사람만이 길을 내는 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 유목민의 시대에는 유목민의 철학과 신학이 필요하다. 길을 내고 새로움을 창조하던 유목민의 삶에서 그 단서를 찾아야 한다. 나섬은 그 유목민의 삶과 신학을 모조리 실행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버리고 내려놓고 포기하며 때론 거부하는 자유로운 유목민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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