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근 목사 열정과 창조의 영성이 세상을 바꾼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고사할 수밖에 없다.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열정과 창조, 그리고 변혁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뿐이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런 항변의 권리도 없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에 대하여 너무도 무관심하였고, 때론 역사의 흐름에 반동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우리의 삶에 대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민족의 고통에 함께 하는 민족교회로서의 가치가 인정받아 비록 작은 수의 기독교였지만 나름대로 사회적 리더십을 가질 수 있었다. 70년대와 80년대의 군부독재정권의 시대에 저항하는 실체로서의 교회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만큼 우리 시대의 방주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며, 동시에 사회변혁의 걸림돌로 지탄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누군가 내 논리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틀림없이 그는 수구이거나 보수임을 자처하는 사람일 게다. 나는 적어도 이념의 틀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교회의 실체를 비판하고 혹은 갱신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명감만으로 이글을 쓴다.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도 소중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민족교회와 독재에 저항하던 경험이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재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회는 교회의 사명인 선교적과제까지 함께 이룩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이기도 하다. 사회적 리더십을 회복하고 선교적 과제를 완수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이다. 이 기회는 우리 교회에 주신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 기회를 통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이제 우리 교회의 책임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다문화 시대'라는 매우 특별한 기회요, 은총이다. 이전에 우리 사회는 다문화 사회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매우 생소하고 특별한 경험이다. 다문화는 우리 교회와 사회의 모습을 예측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다문화 안에는 우리의 미래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존재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혹자는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니냐며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문화는 결코 간단한 현상이 아니다. 과거처럼 일제나 독재와 싸우는 교회의 투사적 이미지는 없지만 적어도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나그네들과 함께 하는 교회라는 측면에서 감동을 줄 수 있다. 이 시대는 교회로부터 감동 받기를 원한다.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모슬렘 국가에 가서 전쟁하듯이 땅을 밟고 기도하면 당장 그 땅이 복음화 되는 줄 아는 몇몇 선교사들 때문에 우리 교회가 얼마나 비판을 받고 있는가? 감동은커녕 무뇌아 집단으로 매도당하는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가 저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음에 아파하고 괴로워하여야 한다. 이즈음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감동의 스토리를 주셨다. 다문화 이주자들과의 어울림을 통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이다. 누가 이 기회를 알아차릴 수 있는가? 나는 지금까지 17년 동안 이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사회에 주신 개혁의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마 전 우리 나섬 공동체에서는 매년 치러왔던 '외국인근로자 체육대회'를 '다문화 축제와 바자회'로 전환하여 개최하였다. 10개국에 달하는 다문화 이주자들 자국의 문화와 음식, 전통놀이, 전통의상 등을 자랑하고 소개하며 다함께 어우러진 근사한 축제였다. 특별히 몽골의 호쇼르, 이란의 케밥, 인도의 치킨커리와 필리핀의 로가우, 한국의 떡볶이 등 다문화 음식전은 매우 큰 호평을 받았다. 몽골음식 호쇼르는 몽골식 만두다. 사실 만두라는 우리 고유의 음식은 몽골로부터 전래된 것이니 만두의 원조를 맛본 셈이다. 몽골 사람들은 양고기를 넣고 만두를 만들어 기름에 튀긴다. 이것이 호쇼르인 것이다. 양고기 튀김만두인 것이다. 이란식 케밥은 또 어떤가? 중동의 다양한 케밥 중 아마도 가장 맛있는 케밥이 이란식 케밥이 아닐런지... 숯불을 피워놓고 잘 구워낸 고기를 구운 밀빵에 넣어 샌드위치처럼 먹는 이란식 케밥은 일품이다. 그날 이란 케밥은 두 세시간만에 동이나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필리핀 음식인 로가우는 필리핀식 닭죽이다. 우리식 닭죽과는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맛에 있어서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음식에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로가우를 맛보기 위하여 필리핀 음식부스에 둘러선 모습이란 참으로 즐거운 축제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인도의 치킨커리는 또 어떠한가? 입맛 까다로운 내게 가장 인상적인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다름아닌 인도였다. 내가 인도에 처음 간 것은 우리 공동체 판가즈 전도사와 함께 그의 고향에 간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촌스럽고 부족하여 외국에 나갈 때면 반드시 김치와 라면을 갖고 나간다. 도저히 외국 음식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에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인도 음식이라야 고작 카레라이스라고 생각했던 내가 할 수 있는 대안이라곤 김치와 라면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판가즈의 집에서 거의 일주일을 머물러야하므로 그동안 먹을 음식의 양 또한 적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적지 않은 양의 김치와 라면을 힘들게 포장하여 가지고 갔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판가즈전도사의 고향인 인도 찬드갈에 도착하여 맛본 인도 음식에 나는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프론타라는 인도음식은 정말 신비 그 자체였다. 이렇게 맛이 있는 음식이 또 있었던가? 그 후로 나는 종종 아내와 인도 음식점에 들러 인도 음식을 즐기는 인도 음식 마니아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이제 인도 음식 치킨커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소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떡볶이는 언제 어디서나 세계적인 음식이다. 나만이 갖고 있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음식 중 떡볶이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다양한 맛과 색깔을 내는 다문화 음식이 어우러진 축제였으니 그 흥겨움과 즐거움이 어떠했겠는가? 그것뿐이 아니다. 다양한 노래와 춤, 그리고 놀이가 함께 난장을 이루니 말 그대로 다문화 축제다. 성공적인 다문화 축제를 마치고 나는 이제야 우리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과 목적지를 알았다. 그것은 진정한 다문화 사회의 전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었던가? 단일민족국가니 순혈주의니 하면서 우리만의 폐쇄적 공동체를 자랑하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 자랑이 진정 자랑이 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화와 다문화 시대를 맞아 우리는 과거의 관습과 관념을 버리고 우리가 가야할 미래를 정확히 바라보아야한다. 우리는 매우 이중적이다.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에 대하여는 무언지모를 열등감에 젖어 굽신거리며 자존심을 구겨버린다. 과거 한국전쟁이후 우리나라에 주둔하던 미군들이나 미국 사람들을 대하던 태도를 더듬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얼마나 굴욕적이었던가? 아직도 그런 사례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에서 친미를 외치며 좌파 운운하며 데모하던 한국교회는 그 중 가장 대표적이다. 미국이 하나님처럼 보여지는 것일까? 선진국에서 온 외국인에 대하여는 언제나 한없이 낮아지던 우리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반면에 후진국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나 다문화 이주자들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천박스러운 졸부의 거만함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은가? 돈 좀 있다고, 조금 잘 먹고 잘살게 되었다고 우리는 정말 너무도 유치한 모습을 내보인다. 열등감과 우월감의 이중적 태도가 외국인과 다문화 이주자들에 대한 우리의 모습이다. 요즘 반외국인 단체가 만들어져 외국인노동자나 다문화 이주자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외치는 자들도 있다. 정말 심각하고 한심한 일이다.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화와 다문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트랜드이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회이며 동시에 위기이다. 120만 명이 넘는 다문화 이주자들의 유입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문화적 갈등과 다툼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은 우리 사회와 교회에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이들을 적이 아니라 동지와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 적을 만들면 반드시 복수의 부메랑이 돌아올 것이며, 동지를 만들면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기회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들을 통해 분노와 저주의 부메랑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축복의 기회를 누릴 것인가?
칭기스칸의 군대는 5만 명이 출병하여, 돌아올 때에는 10만 명이 되어 돌아왔다고 한다. 전쟁에서 이긴 후에는 반드시 점령한 지역의 사람들을 품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제국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제국은 전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과 다문화를 포용하는 관용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칼과 화살로 제국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용맹스러움 뒤에 숨어있는 엄청난 흡입력이 제국을 이루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적은 최소화하고 동지는 최대화하는 것이 제국의 법칙이다. 모두가 칭기스칸의 백성이며 친구가 되었다. 비록 전쟁의 노예로 끌려왔어도 언젠가는 그 노예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당당하게 칭기스칸 제국의 시민이 될 수 있었다. 모두가 다양하지만 하나로 뭉치는 무언가가 그들 안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다문화 시대의 성공사례를 우리는 13세기 칭키스칸의 제국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800년이 지나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다문화와 다양성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관심이 없는 정도를 지나 적대적이며 혹은 무례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태도는 지구촌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돌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90%가 반한주의자가 되어 돌아간다는 통계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친구로 삼고 우리의 동지로 만들어야 했으나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저주는 저주의 열매를 맺는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몽골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솔롱고스'라는 말은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는 뜻이다. 정말 환상적인 이름이다. 몽골인들이 우리를 그렇게 신비하고 아름다운 나라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솔롱고스의 나라인가? 우리가 그렇게 신비한 무지개가 뜨는 나라인가? 우리는 진정 무지개처럼 다양성이 인정되고 다문화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색깔을 만들어내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가? '솔롱고스'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가 정말 솔롱고스라면 우리의 철학과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제는 겉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천박스러운 자본주의의 문화를 걷어 치워야 할 때이다. 진정한 솔롱고스가 되려 한다면 다문화와 다양성의 조화를 꿈꾸는 새로운 영성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은 바로 우리 교회가 되어야한다.
교회가 예수의 정신문화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 낮고 천하며 소외와 왕따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한다.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다문화 이주자들에 대한 과감한 헌신과 나눔이 있어야 한다. 이제껏 우리 교회가 사람을 영혼의 무게로 보지 않고 그가 가지고 있는 겉모습으로 달아보는 문화로 일관했다면 이제는 다문화와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예수의 정신문화를 회복시켜 가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섬공동체는 무지개 같은 공동체이고 싶다. 나섬공동체는 적어도 지금까지 그러한 철학과 가치관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걸어온 공동체이다. 그것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무지개공동체의 모델을 만들어내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 모습 변치 않고 지켜지기를 바란다. 정말 마지막 날까지 타락하지 않고 나그네된 다문화 이주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나섬이기를 소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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