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비오는 어느 날 오후>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요한계시록 3:14-22
차라리 비가 게속 내렸으면 좋겠다. 오늘은 왜 괜한 심통이 나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심통이 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근로자선교를 하면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더 상했다. 며칠 후에 있을 몽골인 근로자들의 ‘나담축제’ 때문이다.
오늘 아침 권 목사가 하는 말이 다음 주에 있을 몽골인들의 나담축제가 걱정이란다.
칭키스칸이 몽골제국을 세운지 800주년을 맞아 몽골 최대의 나담축제를 준비하던 우리 몽골문화원과 선교회 스탭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우리는 이미 매년 이맘때면 몽골인근로자들을 위하여 나담축제를 열었다. 벌써 다섯 번의 나담축제를 개최하였으니 노하우는 우리가 최고다. 많은 몽골인들이 그날이면 우리 선교회에 찾아왔다. 없는 재정에서도 적잖은 돈을 추렴해서 행사를 진행했다. 선물도 사고 양고기 같은 먹을 음식도 준비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역부족이었다. 거의 천여 명에 육박하는 많은 몽골인들이 찾아오는 날이면 정말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 몽골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힘은 들어도 보람은 있었고, 또 다른 선교의 영역을 개척한다는 기쁨도 있었다.
사실이지 한국에서 몽골인 근로자들에게 그와 같은 자기들만의 대규모 축제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즐겁고 반가운 일이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좋아하는 몽골인들의 웃는 모습만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을 잊으며 사역했다. 우리는 몸으로 뛰고 적은 재정이지만 그것을 만들어 그들의 축제를 지원해 주었다.
매년 해를 거듭할수록 ‘한국나담축제’는 열기를 더했고, 준비하는 우리에게도 보람은 있었다. 그런데 올해에 들어서 여기저기서 나담축제를 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담축제가 우리만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것도 대형교회가 뛰어든다고 하니 우리에게는 분명 부담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대형교회 중 하나가 갑자기 몽골인들을 위한 나담축제를 열겠다고 선전을 한다. 자기네 축제에 참석하면 기념품도 주고, 밥도 주고, 선물도 풍성하다고 선전벽보가 붙여졌다. 돈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려는 속셈이 보였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막강한 재정과 인적자원을 동원하여 나담축제를 열겠다는 것이다. 우리와 똑같은 날, 똑같은 축제를 말이다. 그러니 우리 스탭들은 혹시 몽골인들이 모두 그쪽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그쪽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갖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우리는 기가 죽은 것이다.
나담축제를 우리만 하라는 법은 처음부터 없지만 그래도 속이 상한다.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의 터 위에 다른 사람들이 물량공세로 치고 들어오니 속수무책으로 구경만하고 있을 뿐이다. 부자교회가 꼭 저렇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정말 속이 상하고 짜증이 난다. 우리는 이쯤해서 나담축제를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큰 부자교회가 하겠다고 덤비니 우리처럼 가난한 선교회가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몽골인들은 다 저쪽 부자교회의 나담축제에 가게 될 것이다. 우리 쪽은 텅텅비고 사람들은 모두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잔치에 갈 것이다. 부자 교회가 만들어 놓은 보기 좋고 먹을 것도 많은 잔치에...
대형교회가 이젠 우리 같은 특수목회까지 흡수하려고 한다. 작은 교회들이 하고 있는 목회까지 대형교회가 참여하려고 한다. 이미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게임은 끝난 것이다. 대형교회를 이길 수 있는 작은 교회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교회 안에 상업적 자본의 논리만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는 교회와 목회의 윤리도 무너뜨리고 있다. 실제로 지금 한국교회에 무슨 목회윤리가 있고 목회에 대한 의식이 있는가?
오늘 아침에는 슬프고 속이 상하다. 대형교회가 한다는 나담축제와 우리가 하는 나담축제는 뻔한 결과를 갖고 올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그쪽은 그쪽이고 우리는 우리가 아닌가? 열심히 준비해보라고 스탭들을 위로한다. 속은 상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욕할 것도 아니다. 겉으로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대형교회가 한다는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쪽보다 더 잘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 그 말은 맞다.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속앓이가 생기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놈의 대형교회들은 정말 이 시대의 맘몬들이다. 모든 것을 다 잡아먹으려는 공룡이다. 배가 고파 아무 것이나 배부를 것만 찾아 먹어치우는 저들의 식성은 가히 공포스럽다.
그래. 자꾸만 그렇게 살이 찌거라. 그래서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살이 찌거라.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공룡이 되거라.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은 스스로 정리된다.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 교회가 산다.
나는 여전히 작은 것에 희망을 건다. 끝까지 대형교회에 먹히지 않는 순발력과 창조성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정체된 사고와 목회철학으로는 결코 오늘의 대형교회를 이길 수 없다. 그들의 무서운 식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꾸만 우리만의 노마드적 사고를 확장하여야 한다. 노마드가 되어 길 떠나는 목회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공간중심형의 목회에서 시간중심형의 목회로 사고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속도와 시간으로 목회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 칭키스칸처럼 조랑말을 타고 말 꼬리에 먹을 것을 묶고 속도와 시간을 지배하여 달려야 한다. 한 곳에 정착하는 목회가 아니라 새로운 영역을 찾아 떠나는 노마드적 목회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