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난장>
- 비극에서 희극으로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태복음 21:9)
나는 나그네들과 춤을 춘다. 그렇게 춤추는 나그네들 속에서 희망과 위로를 느낀다. 억눌린 감성들이 어느새 꿈틀거리며 고개를 든다. 마치 죽은 듯 누워있던 풀잎이 일어나듯 그들은 서서히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왜곡되고 뒤틀린 인생들에게도 봄은 온다. 나그네들에게 찾아온 봄은 남다른 축복이다. 죽은 듯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던 시절이 지나고 새봄이 온 것이다. 낡은 것을 뒤로하고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봄이다. 얼마나 큰 축복인가?
부활주일을 앞두고 이루어진 종려주일의 행진은 나그네들의 삶에 있어 큰 전환점이다. 눌린 자들에겐 해방의 경험이 필요하다. 디오니소스적인 해방이든, 예수가 거행하는 종려주일의 해방의식이든 한번쯤 그런 경험은 필요하다. 눌린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무도 비극적인 순간임에도 스스로 어릿광대가 되길 거부하지 않으신 주님이 참 하나님이시다.
고난과 죽음으로 가는 가장 슬픈 순간 왜 예수는 가장 웃기는 광대가 되었을까? 어린 나귀를 타시고, 제자와 민중들의 냄새나는 겉옷을 의전용 카펫으로 삼으시며, 군악대의 팡파르 대신 종려나무의 거친 바닥치는 소리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주님의 모습은 한편의 코메디를 보는 듯하다.
고난과 죽음도 하늘의 뜻을 막지 못한다. 그 뜻을 향해 가는 이에게 두렵고 무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것은 고난도 죽음도 즐기는 놀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모습의 삶도 하늘이 주신 놀이로 이해하는 것이다.
유월절의 해방은 예수를 따르는 바보들의 행진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이 자유하며, 즐거운 놀이일 뿐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형식도 관념도 아니다. 억눌린 자들에게 예수의 광대놀이는 즐거운 해방이다. 자유의 만끽이며, 그 놀이는 또한 현실을 소망하는 의식이다.
마지막 난장은 시작되었다.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광대 예수의 모습은 모든 것을 초월한 자유자의 모습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 자의 자유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그를 바라보는 제자들은 또한 자유의 몸짓 앞에 경건한 눈물을 지을 뿐이다. 아! 저 비극의 순간을 희극의 몸짓으로 성화시킬 수 있는 저 자유로움이 진짜임을 알았을까.
나그네들과 춤을 추면서 나는 광대 예수의 예루살렘 행진을 상상한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선교다. 선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로움을 선언하는 것이다. 광대 예수를 따라 고난의 길을 떠나는 바보들의 행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