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적 목회와 세습>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내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마가복음 10:35-45
우리나라 최대의 교회를 세우신 목사님이 정년을 맞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정년을 넘겼어도 목사님은 물러나지 않으신다. 본인은 나가고 싶은데 그 아랫사람들이 붙잡는 형국이다. 그만두고 싶지 않은데 붙잡으니 못이기는 척하며 주저앉아 버린다. 하긴 어떻게 이룬 성공인데 그냥 내려올 수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권좌보다 막강하고 황홀한 그 대형교회의 담임 자리는 그렇게 쉽게 내던질 자리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은 자리다. 그 대물림에는 다른 사람은 안된다. 반드시 자식이어야 한다. 아들이 아니면 사위까지는 가능하다. 동생도 아니다. 무조건 피를 나눈 자만이 그 권좌를 이어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 대물림을 할만한 자식이 없는 경우다.
얼마 전 우리 교단의 제왕적 목회자로 소문난 목사님이 은퇴를 하셨다. 목사님은 자식에게 물려줄 상황이 아니었던지, 자신의 영적인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 영적인 아들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아들도 피를 나눈 아들보다 못한 모양이다. 교회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기 시작했다. 권력과 재산을 놓고 더럽고 추잡한 싸움이 이어졌다. 결국 교회는 갈라졌고, 그 목사님은 성공한 제왕적 목회자에서 실패한 노인네로 전락했다. 슬픈 마지막이다.
교훈은 거기에 있다. 다른 제왕적 목회자들은 그 교회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역시 세습은 내 아들에게만 해야 해. 무슨 영적인 아들이야 아들이? 남은 다 소용없어 피를 나눈 자식만이 내 권좌를 유지할 수 있어’
그로부터 배웠을까? 그 옆 동네 큰 교회에서는 사위에게 세습하려는지 그 사위에게 모든 권력의 핵심 요직을 맡겼단다. 아직 신학교 졸업장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을 그 젊은 사위에게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을 다 맡겼단다. 다른 부목사는 몇 달이 되어도 오후 설교한번 할 수 없는 지경임에도, 그 젊은 사위목사는 매주일 청년부 설교를 도맡아 한단다. 그리고 그 큰 교회 목사님 해외에 나가시기 전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 “내가 우리 사위가 있어 안심하고 외국에 다녀옵니다.” 사위가 있어 안심이란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혁명에 대비한 언급이다. 권력은 나누어 갖지 못한다. 한번 권좌에 앉아본 사람은 그 권좌를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안다. 내려와야 할 시점에도 내려올 수 없는 것이 그 자리다. 부득이 내려와야 한다면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 그 대물림은 남이 아닌 자신의 피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이 지난 어느 교회의 세습에서 배웠던 세습의 원칙이다. 이제 세습하려는 모든 교회는 그 원칙을 지킬 것이다. 피의 아들에게만 세습하라는 원칙 말이다. 영적 아들도 안된다. 사위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어제 광진구 전 구청장이었던 정 장로님을 만났다. 자그마치 26년 동안 구청장 자리를 지키셨다. 세계적인 기록이다. 한번 하기도 어려운 구청장 자리를 거의 반평생동안 하신 것이다.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시다. 그 분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공무원들 중 가장 모범적이고 깨끗한 분이시다. 정말 저런 분이 계셔서 우리나라가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 장로님, 이제 은퇴하시고 어떻게 지내시나요?”
“목사님, 저는 아무 것도 안합니다. 특히 무슨 자리는 절대로 안합니다. 끝날 때 깨끗이 끝내야지요.”
한 말씀하시는 내용이 그렇다. 깨끗이 끝낸다는 말 한마디가 자꾸만 내 마음에 울림이 된다. 칠십이 넘은 연세이지만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과 내공을 갖고 계신 정 장로님의 말씀 앞에 또한번 머리가 숙여진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할 터인데... 그는 아무런 자리도 맡기 않겠단다. 조용히 자연인으로 살고 싶으신 모양이다.
자리를 얻는 것보다 그 자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더 어렵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역사는 증명한다. 산도 오르는 것보다 내려올 때에 더 위험하다지 않은가?
올라가는 자의 뒷모습보다 내려오는 자의 뒷모습이 더 아름다워야 한다. 성공한 자와 나누는 축배보다 끝내고 내려오는 자와 나누는 축배가 더 근사한 법이다. 특별히 목회자에게 그 마지막은 더욱 아름다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디 우리 주변에 그리 아름다운 은퇴가 있는가?
목회자의 세습은 가장 지독하고 추악한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 세상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세습이다. 그것도 목회자의 교회 세습이다. 고난을 세습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영광의 면류관을 세습하는 것은 비성서적인 승계다.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세습은 고난과 십자가만이 전부다. 그 외의 것을 세습하려는 것은 인간적인 욕심과 성공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내려오는 목회자가 그리운 세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