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계신 하나님과의 축복된 만남
창세기 18:1-15
1. 몽골에서 만난 유목민의 마음을 기억하다
나그네를 공경하고 영접하는 문화는 광야에 가면 경험할 수 있다. 내가 매년 몽골을 가면 꼭 들러보는 곳이 바로 초원의 몽골인 천막집 게르다. 어느 해인가는 고비 사막을 갔는데 유목민의 집에 들러보자는 일행의 요청에 따라 어느 한적한 고비의 유목민 게르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은 처음엔 조금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다 내주었다. 정말 이렇게 주어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자기네 집 속속 모든 것을 다 내어주다시피 하였다.
내가 몽골인들을 섬기면서 알게 된 유목민의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저들은 저축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몽골학교 선생님들이 또한 그렇다. 몽골 선생님들은 매달 월급을 받으면 거의 다 소비하고 만다. 그래서인지 월급날이 임박할 때쯤이면 돈이 떨어지고 만다. 그런 달이면 미리 월급을 주면 안되겠느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런 그들의 소비와 저축에 대한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아끼고 저축해야 미래를 살 수 있기에 저축하고 숨겨놓고 조금씩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만 저들 유목민은 그렇지 않다. 있는 그대로 사용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몽골 고비 사막의 한 게르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랬다. 숨겨놓고 내주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말할 사람이 없음에도 그들 유목민은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호방하게 내놓았다. 우리가 갔을 때 그들이 내놓은 것은 마유주였다. 마유주에 대한 소문을 듣고 고비를 갔으니 꼭 한잔 마시고 싶다는 우리 일행의 간곡한 요청에 그 게르의 마유주는 금방 동이 나고 말았다. 큰 대접 사발에 마유주를 듬뿍 담아 나누어 주는 주인 유목민의 얼굴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듯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일까? 그들에게 저것은 바로 생존의 근거가 아닌가? 저것이 없어지면 당장 그들이 먹고 마실 것이 사라지는 것임에도 그렇다.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은 곧 생명이다. 그들에게 마유주는 그런 것이다. 어디 가까운 곳에 마트가 있어 먹을 것을 사 올 수도 없다. 마실 것도 마땅치가 않다. 당장의 생존을 위하여 최소한 저축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
나와 내 가족을 위하여 남겨놓는 것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왜 잘못인가? 그런데 저 몽골의 고비 유목민은 자신의 것을 남겨놓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방인인 우리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는 정말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인가? 유목민에게 나그네는 또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 하는 것인가?
유목민의 문화 중 어떤 경우에는 나그네에게 자신의 아내를 주는 예도 있었다고 한다. 우성의 혈통을 보존하려는 유목민의 문화라고도 하지만 어쩐지 우리의 문화와 가치관으로는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것도 친절이며 나그네를 영접하는 유목민의 문화라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그날 우리 일행은 모두 마유주로 인하여 배탈이 났다. 여간해서는 몽골음식을 먹지 않았던 나도 기분이 좋아 마유주 두 잔을 마시고는 그만 배탈이 나고 말았다. 배가 아프고 속이 쓰리고, 설사가 나고 정말 난리였다. 우리 집사님 중 한 분은 아무 것도 마시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까지 무척 고생을 했다.
유목민의 사랑이 너무 넘쳐 그 사랑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속의 현대인에 대한 하늘의 메시지였나 보다. 나는 아직도 그 유목민을 기억하고 있으니 단순한 배탈이거나 마유주는 아닌 듯하다.
2. 나그네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
창세기 18장과 히브리서 13장 1절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그 안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 사람으로 변장하신 하나님과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 분명히 그들은 천사와 야훼다. 다만 사람의 얼굴과 몸으로 변장했을 뿐이다. 이것이 나그네 신학의 핵심이다.
나는 언제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역을 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말씀이다.
어느 날 나그네가 되어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상상하면 무척이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공동체 식구들을 마주하여야 한다는 마음을 갖는다.
어느 누구하나 예사스럽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조심스럽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변장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이다.
나그네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이 오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믿는다. 확률 상 우리 나섬이 가장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나그네로 오실 것이고, 그렇다면 나그네를 섬기는 나섬이 그 현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확률과 가능성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관심은 오케스트라이고 잘 구성된 예배이며 성가대의 아름다운 목소리인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오시는 곳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하는 시크릿(The Secret)이라는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에서 끌어당김의 법칙이 갖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희망의 법칙과 다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 이는 믿음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종말론적 삶에 대한 마지막 기다림을 살아간다. 기다림을 삶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것은 나그네로 오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나그네로 오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며 희망이다. 오늘 내 삶의 궁극적인 의미다.
하나님은 나그네로 오신다. 이것은 진리이며 하나님의 증거가 이미 성서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셨다. 나그네로 오셔서 큰 대접 받으시고는 아들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다. 아들은 소망이며 희망이고, 은혜이며 축복이고 성공이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은 모든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예고하시니 이것이 성공이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 전개될 미래를 조금이라도 미리 알고싶은 것이다. 언제 내 인생에 대박이 터지고,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싶다.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늘을 보고 별자리를 보았고, 하루도 빠짐없이 포춘텔러(The Fortune Teller)라는 점쟁이 프로그램에 접속하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은 모두의 관심사다. 올해는 선거가 있으니 점집이 문전성시란다. 예고와 예언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는 늘 알고 싶어한다. 우리 미래를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준비하여야 하는지 묻고 싶어한다. 조상님 묘지를 옮겨야 하는지 집터를 바꾸어야 하는지...
그런데 성서가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그 방법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삶이 곧 축복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함에도 사람들은 삶보다 허상에 대하여 믿고싶어 한다. 믿음이 아니라 자기 체면에 걸리고 싶은 것이다.
나그네로 오시는 하나님을 보라고 하심에도 나그네는 없고 허공만 본다. 눈이 멀어서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다. 눈먼 교회가 그렇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여기 존재한다고 말해도 이곳이 아닌 딴곳을 본다. 나그네가 하나님이라고 말해도 우리는 하나님은 좋은 곳에 계시다며 다른 곳으로 찾아 간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가르쳐도 모르는 세상이다. 아니 교회다.
아브라함처럼 숨어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하나님은 숨어계시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것이 착각이다.
3. 나그네는 예수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 예수께서 친히 자신과 소자 즉 작은 자를 같다고 하신다.
작은 소자가 곧 예수 자신이라는 선언이다. 하나님이 나그네이신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나그네로 설명하신다. 예수를 만나려면 나그네에게 다가서고 섬겨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그래서 세상이 공평해지며, 그래서 사랑이 강물처럼 넘치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는 자신을 위장하셔야 했다. 위장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세상을 너무 쉽게 살려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숨기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는 돌보지 않고 자신들만의 축제를 하려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들 편이 되지 않으면 교회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은 돌보지 않고 자신들만의 성을 쌓으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작은 자가 되어야 하고, 예수께서 그들 편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 나그네가 되어야 사람들이 나그네를 조금이라도 돌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의도는 이미 사라진 것 같다. 성 쌓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예수와는 상관없는 교회를 만들었다. 바로 바벨탑이다. 예수, 아니 정확히 노숙하고 방랑하는 나그네 예수와 만나는 것이 성공임에도 그들은 세상의 성공을 찾아 예언하고 유혹하는 무당을 찾는다. 예수 없는 교회, 무당이 된 예수다.
우리는 분명 바알의 굿판과 예수를 구별하여야 한다.
4. 이삭! 웃기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의 목적은 이삭이다. 그에게 가장 큰 축복은 웃음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웃기시는 것이 성공이다. 우리를 웃기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자. 하나님이 웃기시는 인생이 성공하는 인생이다. 나는 웃고 있는가?
이삭은 '하나님이 웃기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름다운 삶에 대하여 이삭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아들을 주신 것이다. 아름다운 삶이란 바로 나그네로 오신 하나님과 천사를 영접하는 모습을 말한다.
이삭의 축복은 섬김의 삶을 통한 선물이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섬김과 선교다. 선교하고 나누는 삶이 가장 의미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다름 아닌 섬김이고 선교다. 나누고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인답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삶이 선교이며 선교가 곧 삶이어야 한다. 삶과 선교가 나누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이다. 둘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이며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한몸이다.
5. 사랑하면 성공한다.
창세기 18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책이다. 아브라함의 성공과 축복에는 아름다운 마음과 삶이 있었다.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에는 신비한 비밀이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배울 수 없는 무척이나 고귀한 가치와 삶에 대한 통찰력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성공의 통로는 사랑이다. 사랑은 섬김과 나눔을 말한다. 그러나 그 섬김과 나눔에는 하나의 원칙이 숨어 있다. 같은 부류의, 자기들끼리의 섬김이나 나눔은 가짜라는 것이다. 철저히 작은 자들과의 동거와 나눔이어야 한다.
어제 아내가 영화를 보고 왔다며 그 이야기를 한다. 블라인드 사이드(The Blind Side)란다. 무슨 스토리인지 물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감동이 전해진다. 나는 무슨 눈먼 사람의 이야기, 나 같은 장애인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그런데 실은 눈먼 사람들이 보고 눈뜨라고 가르치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에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미국의 주류 사회에 속한 어느 백인 부부가 아주 볼품없고 지능이 낮은 흑인 소년을 데려다 키우는 이야기란다. 나중에 그 흑인 소년은 성공의 자리에 서게 되는데 그 백인부부의 역할이 컸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이다.
자기들끼리 주류의 잔치가 아니라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집단속에 속한 사람, 그중에서도 부담스러운 존재와의 동거가 진정한 나눔이며 섬김이다.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 사랑인가? 사랑하기에 부담스러운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닌가? 나는 아직 진짜 사랑은 못해보았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은 한다. 지금까지 그런 사랑 한 번 해보자고 덤벼든 인생인데도 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리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참으로 부담스럽고 힘이 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의 부담이 더 크다.
사랑하지 못해서 나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나그네를 섬기는 것이 내 사역인데도 나는 아직 진짜는 아닌 것 같다.
사랑해야 성공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다. 주고 밑지는 삶이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남기고 싶다. 겉은 남기지만 속은 밑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함으로 성공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사랑의 원리를 모른다. 삶이 없으니 진정한 성공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없음으로 진짜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이 증거 되지 못한다.
창세기 18장의 나그네 섬김이 곧 사랑의 길이다. 그 조건 없는 섬김이 뜻밖의 성공을 이끈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성공이다.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과 성공은 이런 것이다. 아무런 전제 없는 순수한 섬김과 나눔의 삶이 곧 성공의 길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겉의 하나님이 아니라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나그네로 변장하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이다. 그런 줄 모르고 바알의 굿판에서 헤매는 자들은 불행하다. 바알의 굿판은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에는 없다.
섬김과 나눔이 성공 경영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6-07-01 11:18:23 노마드톡에서 복사 됨]
http://nasom16.cafe24.com/bbs/board.php?bo_table=B02&wr_id=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