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공 경영학 1-떠남과 축복 > 노마드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노마드 이야기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 1-떠남과 축복


떠남과 축복 
창세기 12:1-9


성서에서 가장 복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곳이 어디인가 묻는다면 아마도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과 창세기 12장의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복 받는 삶에 대한 동경은 비기독교인은 물론이고 우리 신앙인들도 한결같이 바라는 바가 아닐까? 이 세상에서 남다른 복을 받고 싶은 욕망은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한 소망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이제 그러한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희망에 대한 답을 성서에서 찾고자한다.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이 강좌는 강좌를 듣는 이에게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무척이나 설레이게 하는 여정이다. 우리 모두 궁금함과 설레임이 함께하는 탐험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성공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지 발견하는 은총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성공에 대한 가치나 개념을 하나로 정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신앙인들에게 성공의 개념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혼란스러운 논쟁거리만 만들뿐 어떤 시원한 답도 만들어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성공과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쫒아가는 성공은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그 성공의 기준과 가치가 같은 것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런 의미를 던져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성공과 우리 기독교인의 성공은 달라야 한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우리 신앙인들 또한 세상적인 성공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세상적인 성공을 통하여 기독교의 성공적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좋다. 이제 한번 그 성공 경영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도전해 보자. 과연 무엇이 성공이며 하나님의 성공과 세상의 성공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하여 솔직하고 정의롭게 토론해 보도록 하자.

1. 아브라함은 성공한 사람인가?
아브라함은 열방의 아비이며 믿음의 조상이다. 창세기 12장부터 역사의 출발이 시작된다고 하니 아브라함은 성공적인 인생의 출발을 한 셈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개인의 삶이 성공한 인생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의 삶과 인생 여정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헤매고 방황하며 살았던가?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이다. 수 천 년의 이스라엘 역사가 과연 성공적인가를 묻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고난이 성공인가? 이 대답은 마지막에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모습은 고난이며 그 고난을 축복이고 성공적 삶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브라함은 결코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그가 열방의 아비이며 믿음의 조상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이름 뒤에 붙은 이 찬란한 별칭은 그의 삶이 종국에는 가장 축복된 사람이었다고 증언하고 싶은 것이다.

다문화 이주자들을 돕고 선교하며 살아온 지 어언 18년이 지나간다. 1992년 겨울 구로공단으로 들어가 시작한 나의 사역이 2010년 지금 여기까지 왔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여정이다. 나 스스로도 전혀 의도하지도 예고하지도 못한 삶이다. 당시 구로공단에 들어가 보니 어느 누구도 외국인노동자들을 돕고 있지 않았다. 물론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몇몇은 있었지만 나처럼 본격적으로 이 사역을 시작한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도전이다. 그러나 그만큼의 두려움은 상존한다. 그 두려움을 감당한다는 것은 최초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인생에게는 기본적인 과제이다. 처음이 되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거운 중압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이미 걸었던 길을 가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그 길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묻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이 걸었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무조건 그 길을 쫒아간다. 
나도 그랬다. 다른 사람이 간 길을 가는 것이 쉽게 보였고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한번은 이단자처럼 역주행을 하고 싶은 욕망이 인적도 있었다.
역주행의 기회가 왔다. 이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내가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이 길만이 가야할 것 같은 예감이다. 군목 전역과 결혼, 두 아들의 아비가 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방황했다.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던 어느 날 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내 운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정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최초의 사역이라는 의미만으로 내겐 충분했다. 나는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역시 비주류이며 이단자적인 삶을 살고 싶은 저항아였다. 그런 기질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오히려 그 후로 쉼 없는 실패와 절망을 경험해야 했다. 단순한 실패이거나 절망이 아닌 죽음의 끝에서 보는 아픔이며 언제나 마를 날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고단한 삶이었다.
피곤하고 지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미 나는 세상의 성공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성공 따위는 없다. 

아브라함은 성공한 사람인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이 두 가지 역설적인 대답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들은 실패한 민족이며 인생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와 그의 후손은 성공한 사람들이다. 당장의 삶은 고달팠지만 그들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역사의 평가를 받을만한 사람들이다.


2. 먼 성공시대를 열어라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큰 성공을 이루었다고 그 사람의 인생과 삶의 마지막도 그런 성공이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처음은 창대했지만 마지막이 궁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수도 없이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다.
어쩌면 진정한 승자는 마지막에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이 찬란한 사람이 진짜 승자이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왜 이리도 안목이 짧은 것인가? 오늘 성공했다고 폼 잡고 뻐기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안쓰러운지...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다. 아마도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날 아침 무언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단함의 여정을 운명처럼 느꼈을 게다. 당장 고향 우르에 머물며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이 기득권의 자리를 버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미래를 향해 떠나야하는 두려움이 공존했을 것이다. 운명처럼 링 위에 올라야 하는 권투 선수처럼 말이다.

당장의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제대로 인정받는 성공이란 마지막의 모습 속에 간직되어야 한다. 끝이 아름다워야 진짜 성공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이 말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산다. 당장은 아니지만 마지막에는 내가 이길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언제나 이 말을 믿고 싶었다. 마지막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되뇌이며 그렇게 오늘을 이겨나간다.

나는 지금 얼마나 초라한가? 며칠전 장로회신학대학 신대원 신앙수련회의 특강 부탁을 받고 다녀왔다. 몇몇 성공했다는 목회자들이 그 특강 강사들이란다. 그런데 그 자리에 내가 있다. 정말 나는 성공한 목회자인가? 아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있을 뿐이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자리가 편치 않다. 마치 안 맞는 옷을 입고 앉아있는 느낌이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강렬한 느낌이 온다.
솔직히 그런 자리에 불러주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내가 그런 곳에 가야 하는가 싶은 고민이 있다. 가고 싶지만 가서는 안될 것 같은 이중성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열등감 속에 갇혀 산다. 그래서인지 내 열등감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내 열등감에 불을 붙이면 나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한다. 어제도 그랬다. 지고 싶지 않은 게임에서 지고나면 나는 속이 상한다. 그 게임의 룰이 정정당당하지 않아서 그렇고, 그 패배의 이유가 내 눈이 안보여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면 나는 한없이 고통스러운 밤을 보낸다. 정말 질 수없는 게임에서 지는 날이면 내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열등감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속이 아픈 것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내 눈이 안보이면 그런 만큼의 핸디캡을 주고 정당한 게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임에도 그렇다. 오히려 눈이 안보이는 내가 동등한 입장에서 경기를 하자고 덤비는데도 어떤 선입관으로 그들은 나를 부정하려 한다.
몇 타수 접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동등하게 게임을 하자고 했다. 내가 눈이 안보이니 나를 조금 불쌍하게 여겨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동등하게 싸우자고 했다. 내가 이렇게 연약하니 나를 이해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과 똑같이 취급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이상으로 나를 링에서 내려오도록 했다. 게임을 할 수 없다고... 나는 게임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누가 불공평한 것인가?
나는 똑같이 그렇게 해보자고 했다. 눈이 안보여도 좋으니 나에게 양보해 달라고 조르고 싶지 않았다. 동등하게 게임의 룰을 적용해 달라고 했다. 나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지 말라고 했다. 나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으며 열정적으로 지금도 살고 있다고도 했다. 그랬다. 정말 나는 그렇게 동등하게 똑같은 룰에 의하여 게임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게임을 진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공평하게 이끌었다. 
그들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내 삶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나를 열외의 인생으로 제외하였기 때문이다. 게임의 대상에서 배제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정말 더 투명한 기준으로 붙어보자고 했을 때에 그들은 나를 안된다고 하면서 나를 빼버리고 그들만의 리그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열등감과 초라함의 극치를 살아간다. 나는 졌다. 실패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눈물이 흘러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없을 만큼 아프지만 그렇다고 아직 마지막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이겼다고 환호성을 지를지 모르지만 아직 모든 것은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포기하지 않았음으로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것을 원한다. 내 삶에 어떤 인센티브도 싫다. 동등하게 붙고 싶다. 경쟁하여 때로 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쟁이 너무도 불공정하다면 이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것이 싫다. 내 눈이 안 보인다는 것 때문에 내 삶이 이렇게 왜곡당하는 것이 싫다. 나는 결코 그렇게 함부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정정당당하게 붙고 싶었던 것이다. 정당한 패배라면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게임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게임과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먼 성공시대를 열었다. 그는 당장은 아닐 것이라고 예견했을 것이다. 당장은, 오늘은,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은 자신의 것이 옳다고, 그가 성공했다고 승자가 되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3. 광야로 나아가야 성공이 보장 된다
복 받는 사람보다 복의 근원 되는 삶이 더 좋다. 복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보다는 내 자신이 스스로 복이 되면 더 좋겠다.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온다. 왜냐하면 그가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복을 주는 사람이다. 복의 출발이며 원천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복의 아류가 아니라 복의 근원지였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복의 원천은 광야에 숨겨져 있다. 그래서 성서는 복을 찾으려면 무조건 광야로 나아가야 한다고 권고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인물들에게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다니엘과 에스더와 세례요한과 예수와 바울이 그렇다. 그리고 그런 복을 찾으려면 광야로 나아가야 한다고 선지자들이 끝없이 이야기 했었다.

스스로 선택하든 힘에 의하여 밀려나가든, 아니면 어쩌다 광야에 나가야 했던 운명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성공경영학의 히든 시크릿이다.
하나님의 숨겨진 성공 경영학은 그래서 신비로운 것이다. 광야가 그 해답이다. 성공하려면 광야로 나가라는 것이다. 광야로 나가면 그 광야에 비밀스럽게도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은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삶의 울타리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 안에 안주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본토 고향과 아버지의 조상들이 살았던 틀을 깨고 나아가라는 명령은 듣기에는 잔인하고 매몰찬 명령이다. 따뜻한 안방에서 갑자기 추운 겨울 얼음을 깨고 얼음장 밑으로 몸을 드밀라는 말보다 더한 명령이다. 하지만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나가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편안해질만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다시 광야로 나아가라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나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마음에 칼 같은 말씀으로 도전을 주셨다.
어떻게 집을 나가라는 말인가? 집이란 울타리이며 생존의 공간이다. 집을 떠나면 죽는다는 두려움은 어느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은 단호하게 말한다. '광야로 나가야 성공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성공하기 싫은 사람은 광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만약 스스로 자발적으로 나가지 않으려 한다면 그도 역시 하나님이 내쫓아 광야로 몰아가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성공시키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강제로 밀고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광야로 자꾸만 밀려나가는 느낌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강제적으로라도 성공시키고 싶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 고난의 바다에 있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난은 성공의 또 다른 이름일 뿐.

1990년 7월 군목을 전역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내게 작은 놈 영길이의 장애통보는 충격이며 큰 좌절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판단이었다. 어떻게 내게 그런 아들을 주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우리 아들 영길이가 너무도 사랑스럽고 감사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철없고 어리석은 아빠였다. 한 번도 실패의 경험이 없어서였을까? 나는 내게 주어진 좌절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절하고 또 거부하고 싶었다. '하나님 나는 이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택배 기사는 내게 장애를 가진 아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이라고 내려놓고는 떠나간 것이다. 받아들고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방황하고 헤매었다.  

그러던 중 1994년 5월 나는 갑작스럽게 눈에 이상이 생겼다. 눈이 안보이는 병이다. 점점 실명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갔다. 이 또한 욕심 많고 자존심 강한 내게 주어진 선물이며 은혜란다. 그런 은혜는 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내 것이었다. 자구만 밀고 가시는 모양새다. 광야로 내모시는 느낌이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밀어붙이시는 그 강력한 힘을 느끼곤 있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이 나를 성공시키려는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이다. 우리는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주목하시면 성공할 수가 있다. 다만 그 길이 고생길이라는 점만은 알아야 하지만 말이다. 아브라함처럼 순순히 광야로 나간 사람도 있지만 야곱이나 요셉처럼 밀려가거나 끌려간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광야에 나가야 복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 광야에 나가야 드디어 복의 줄기를 붙잡는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고정관념과 기득권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은 밥은 먹고 살겠지만 그에게 성공이라는 삶은 없다. 성공한 사람은 한결같이 남보다 한 발 앞서 새로운 미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 사람들이다. 그 새로움이란 광야였고, 고생길이며 고달픈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의 광야에 성공의 기회가 있기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가야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나갔든, 끌려 나갔든 지금 광야에 있다면 그것은 축복의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고 믿으면 된다. 
1996년, 나는 실명의 위기에 직면한 채 구로동에서의 사역을 접고 뚝섬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리고 일 년 후 우리 공동체가 머물던 작은 교회의 지하실에서 쫒겨나다시피 나오게 되었다. 외국인들이 많이 오니 더럽고 불편하다는 이유다.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교회 장로님들이 얼마나 큰일을 하셨는지 참으로 감사하다. 정말이다. 만약 그때에 아무런 걱정 말고 끝까지 여기서 살라고 하셨다면나는 오늘 여기 없었을 것이다.
광야로 나가라는 명령처럼 나는 두려웠지만 두려워하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위기였다. 잘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충만했었다. 새로운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순간 내게는 전혀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축복의 길이 열린 것이다.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고난은 기회를 준다. 문제는 그것을 기회로 인식하는 긍정의 자세이다. 위기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을 배워야 한다.
나는 단돈 일백만원으로 강변역 지하실에 우리만의 작은 공간을 계약했다. 그리고 불과 6개월 만에 2억 5천만 원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축복으로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를 광야로 밀어 내시어 축복하셨다. 만약 뚝섬의 그 교회 지하실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주저앉아있기를 고집했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았을 것이다. 밀어내시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전략이다. 광야에 복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 나섬은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삼고 성공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정말 기적의 연속이다. 나는 위기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6-07-01 11:18:23 노마드톡에서 복사 됨] http://nasom16.cafe24.com/bbs/board.php?bo_table=B02&wr_id=127



hi
   


[04982]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로 1(광장동 401-17)
나섬공동체 대표전화 : 02-458-2981 사단법인 나섬공동체 대표자 유해근
COPYRIGHT © NASOM COMMUNIT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