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고통의 역사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
본인은 1993년 9월, 한국교회외국인노동자선교협의회를 처음 조직하고 초대총무로 일하였는데 당시로서는 무척 생소한 선교연대기구였다. 그리고 벌서 17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의 이주자선교역사를 회고하니 새삼 그때가 기억난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었는지...
1992년 겨울, 내가 구로동으로 들어가 외국인근로자들을 선교한다고 덤벼들었을 때 나는 세상에 무서운 것 없는 패기만만 혈기왕성한 젊은 목사였다. 군목을 전역한 후, 미국 유학의 꿈을 접고 구로공단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무언가 남이 하지 않는 새로운 목회와 사역에 집중하던 시절이었던 터라 웬만한 고생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좌절의 시간도 있었기에 결국 나는 눈의 시력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모든 것을 다 상실하고 나는 구로동의 사역을 접고 성수동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성수동에서의 외국인 사역은 힘이 들었지만 또 다른 의미를 전해 주었다. 그것은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잃어버릴 수 있었던 희망을 되찾게 해 준 것이었다.
고통과 절망은 컸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기쁨과 은혜가 있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외국인근로자 선교 사역의 역사이며 현장이다. 이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이주자선교 사역자로 살아야 하는 모든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고통이다.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 오늘의 선교현장을 만들 수 없다. 이 아픔의 삶은 필연이다.
나그네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마치 광야의 히브리 백성을 이끌고 나그네된 심정으로 40년을 유리방황하던 모세의 고민과 다를 바 아니다. 모세의 고민이 없이 히브리백성이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의 살아있는 신앙적 체험이 없이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을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고통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나그네 선교역사에는 고통의 역사와 더불어 신앙의 체험과 증언의 역사도 공존한다.
나. 혼돈과 왜곡의 시대를 넘어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여파는 당시 산업선교나 노동운동권 내부의 정체성과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갑자기 불어닥친 민주화의 열기는 산업선교와 노동운동의 현장을 혼란케 했다. 산업선교를 하던 목회자들에게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탈출구를 찾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외국인근로자들이었다. 초기 그들의 외국인근로자들에 대한 입장은 무척 적대적이었다. 특별히 나와 같이 외국인근로자들을 돕던 목회자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었다.
노동조합의 결성에 외국인근로자들이 장애요소가 되며, 임금 상승의 기대효과를 떨어뜨린다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산업선교와 민중교회 목회자들이 어느새 외국인 근로자 선교의 한복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마치 점령군들처럼 그들은 외국인근로자 운동이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홍보하고 또한 우리 사회가 그것을 인정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인권과 선교라는 두 축에 대한 갈등과 논쟁이 시작되었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우리 안의 사역자들은 크든 작든 이 두 개념을 놓고 고민하게 되었다. 무엇이 우선인가? 교단과 신학적 입장에 따라 각기 자신의 사역과 공동체의 모습이 달라지게되었다. 복음주의 단체와 운동성을 강조하는 단체가 나누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그 구별이 모호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1995년을 전후로 심각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특히 운동성을 강조하던 그룹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각각 나누어지는 모습도 있었다.
당시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달라며, 어떤 그룹은 명동성당, 또 한 그룹은 백주년 기념관, 또 다른 그룹은 기독교 회관 등에서 각각 농성을 하며 동조를 부탁하기도 했었다. 소위 사회운동이나 민중교회 운동을 선도하던 그들의 분열을 보면서 개인의 명예와 이해관계가 이념이나 신학적 입장보다 우선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지금 그들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다.
반면에 복음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며 각자의 선교사역에 전념하던 보수적 사역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2008년 11월에 시작된 '이주자선교를 위한 한국교회 네트워크'(이선한네트워크)가 그것이다. 이는 그동안 한 길을 걸었던 사역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결과이다. 조금은 느슨한 연대조직이지만 이선한네트워크는 2009년 8월 15일 여의도순복음교회당을 빌려 적어도 7,000명이 넘는 대규모의 선교대회를 시작으로 다양한 형태의 선교사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교회 외국인근로자선교의 역사에 중요한 출발이 되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땅 끝에서 온 사람들은 운동의 대상이 아니라 선교의 대상이어야 한다. 적어도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사명이 있다. 문제는 선교에 대한 통찰력이며 선교에 대한 고백의 문제이다. 무엇이 선교인가라는 생뚱맞은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던 외국인들은 농성 이후 출입국관리소에 의하여 전원 강제출국 혹은 집중관리 대상으로 낙인 찍혀 한국 사회에서도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을 데리고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외국인들은 이용만 당했다는 배신감으로 가득했었다. 그 기독교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외국인근로자들을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아닌가? 물론 이러한 내 주장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과장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투쟁이었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 그들 운동권 목사들만이 알테니까 말이다.
다. 다문화 이주자 선교의 미래와 전망
이제 외국인근로자라는 명칭도 수정되어야 한다. 외국인근로자라는 단어 대신에 다문화 이주자라는 말이 보다 정확한 것 같다. 이미 120만 명의 다문화 이주자들이 우리 사회에 유입되었고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이 되었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변화뿐만 아니라 선교사역의 내용과 방향에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들이 바로 땅 끝에서 온 사람들이다. 여기가 땅 끝이 되었다. 이제 다문화 이주자의 트랜드 가운데 새로운 선교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교회의 목회와 선교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 목회가 곧 선교이다. 목회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선교를 하던 순서가 아니라 동시적인 사역인 것이다. 이미 농촌교회에는 다양한 국가나 민족으로부터 유입된 많은 결혼이주자들이 살고 있다. 농촌목회자에게 세계선교의 기회가 왔다. 농촌에서도 다문화를 모르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도시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선교와 목회는 동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외국인 며느리나 이주자들을 개토화하거나 나누어서는 안된다. 한 가족이니까 말이다. 그들은 남이 아니라 우리안의 이웃이다 그들은 이웃을 넘어 바로 내 아내이며, 며느리이고, 자식들이다. 통합적 목회와 선교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찾아가는 선교에서 '오늘 여기'가 선교지라는 보다 투명하고 효과적인 선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유목주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국경과 민족의 개념이 없어진다. 공간의 개념보다 속도나 시간의 가치가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공간의 한계는 이미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공간속의 선교 혹은 목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문화 이주자들에게 공간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속도를 지배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들은 언제든 여기를 떠나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그곳을 채운다. 공간 안에 가두어 두었던 사고를 지양하여야 새로운 유목주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다문화 이주자 사역은 대세다. 다문화 이주자 사역을 모르고 미래 사회나 미래 교회를 말할 수 없다. 앞으로 더욱 많은 전문 사역자들이 이 사역에 전념하는 날이 올 것이 분명하다. 다문화 이주자 사역이 미래교회를 주도하는 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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