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력 5.0의 몽골인들처럼 멀리보라
몇년전 우리 몽골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시력 측정을 한 적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거리에 콩알 몇 개를 떨어뜨려놓고는 몇 개나 떨어져 있는지를 물어보는 실험이었다. 그날 우리 몽골 아이들은 놀랍게도 콩알의 갯수를 정확히 맞추었으니 과연 몽골인의 시력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눈이 안좋은 것을 지나 아예 보이지 않는 내게는 감탄의 경지 그 이상이다. 독수리의 눈이라면 몰라도 정말 사람의 눈이 그렇게 좋을 수 있을까?
몽골의 유목민들은 눈이 좋다. 그들은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적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그때서부터 게르를 해체하여 도망을 한다. 천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만리를 보는 것이다. 눈으로 적인지 아군인지를 확인하고 도망하거나 맞이하는 유목민들의 시력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동물의 눈이거나 신의 눈이 아닐까 싶다.
그런면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눈이 좋은 사람들이 몽골 사람들이다. 시력이 5.0이라는 믿을 수없는 이야기도 있다. 하긴 몽골에 여러 번 가보았지만 안경을 쓰고 다니는 몽골인들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1999년 몽골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조금의 시력이 남아있었다. 그들의 모습도, 사는 문화도 보았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없었다. 고작 몇 명이 안경 대신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안경점을 찾아볼 수도 없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몽골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인 근로자들 중 안경을 쓴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요즘들어 다시 몽골인들을 들여다본다. 우리 몽골학교 아이들 중 안경을 쓴 학생이 몇 명인가? 그 당시보다 안경을 쓰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이 늘긴 하였지만, 한국 아이들과 비교하면 그 수는 매우 적다. 왜 그들은 그렇게 시력이 좋은 것일까?
나를 아는 많은 몽골인들이 하는 말은 내가 몽골에 살았으면 눈이 좋아질 것이란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보고 특별히 초록의 초원을 바라보며 살다보면 눈에 더할나위없이 좋을 것이란다. 하늘은 어떤가? 블루 스카이의 나라다. 그러므로 공해와 오염이 없는 하늘과 땅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태초에 만들어주신 그대로의 시력을 간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수리같은 유목민의 눈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주시는 축복의 선물이다. 모든 창조물을 그대로의 질서와 자리 위에 보존하는 저들의 신앙적 삶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다. 작은 것에 연연하고 눈앞의 이해관계에 얼마든지 세상을 속이려드는 우리 자본주의에 물든 세속적 인간에 대한 차별적 은혜이다.
당장의 표피적 모양에 심취한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결코 헛되지 않을 유목적 삶에 대하여 관조하라는 충고이다. 눈을 잃어버리고 어두움 속에 살아가는 내게 몽골의 유목민들이 보여주는 눈과 시력은 어쩐지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지고 있다. 당장의 눈이 아니라 멀리보는 안목의 눈을 가지라고 가르쳐 주는 선생님 같은 눈초리이다.
신앙이 무엇인가? 아브라함과 롯의 마지막 이별장면을 연상해 본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멸망의 성을 선택한 롯과, 당장은 척박한 땅이지만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비전을 느끼고 바라보았던 아브라함의 눈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눈이 좋아야 하늘의 뜻을 안다. 아브라함은 롯보다 멀리보는 안목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를 보는 안목과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이다. 눈앞의 손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요, 믿음이다.
눈이 좋은 유목민들은 마치 아브라함의 그 믿음과 비전을 바라보는 신앙인들처럼 보인다. 눈앞을 보면 눈이 멀고, 눈이 볼 수 없는 저 먼 미래를 보는 눈은 밝다. 나는 그래서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당장의 문제 앞에 절망하고 좌절함으로 육신의 눈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야 또다른 눈에 대하여 생각한다. 내 육신의 눈은 1cm 눈앞의 그 어떤 것도 구별하지 못하지만 이제 마음과 영혼의 눈으로라도 다시 세상을 보고 싶다. 이제는 멀리 보아야 한다. 먼 미래의 꿈을 바라보고 하늘이 주신 그 아름다운 비전을 보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눈이 좋은 유목민들과 세상에서 가장 눈이 안보이는 목사가 함께 산다. 얼마나 재미있는 광경인가? 이제 그 유목민들은 내 눈이 되어 나를 인도한다. 그들은 나를 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은 내 손을 잡고 그들의 미래를 향하여 함께 가자한다. 이제야 그 미래와 그들의 땅이 보인다. 이제야 그 사람들이 보이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보인다.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세속의 것들에 너무도 몰입한 결과다. 버리고 떠나고 포기하는 유목민의 안목을 알았다면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눈앞의 이익과 작은 욕심에 너무도 연연했다.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내 작은 마음이 나를 망쳐놓았다. 대범하지도 않으면서도 속 좁은 사람이라는 말 듣기 싫어 자존심같은 어떤 것에 매달려 살았다. 자유가 없어서 실패했다. 자유는 멀리 보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인데 나는 자유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방종했고 자유를 내 마음대로 사용했다. 그래서 나는 육신의 자유를 잃고 포로가 되었다.
믿음의 눈이 나빠서였다. 볼 수 없는 것을 보아야 했는데 나는 볼 수 없는 것은 보지 않았다.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며 내 육신을 믿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후회가 된다.
다시 유목민에게서 보는 것에 대하여 배워야 한다. 눈앞에서는 더러운 것이 잘 보이지만 멀리보면 다 아름답다.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밖에 볼 수 없지만 크고 넓은 것을 바라보는 눈은 세상 모두에 대하여 긍정하도록 한다.
나는 시력 5.0의 유목민들과 산다. 이제는 그 아름답고 총기어린 눈들이 나와 함께 있어 행복하다. 내 눈을 잃었지만 저들 유목민의 눈이 나를 지키고 있으니 행복하다. 그들의 눈은 이제 내 눈이 된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역사와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길을 떠난다. 나는 그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시력을 믿으며 역사와 세상이 그 눈 안에 있음을 안다.
우리 공동체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 먼저는 외국인 신학생들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기업이다. 그 사회적 기업 가운데서도 양평의 다문화 생태 마을과 커피 사업을 하는 프로그램은 남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다.
외국인 신학생들은 이제 너무도 유명해 진 우리만의 사역이다. 장로회 신학대학을 다니는 5명의 외국인 신학생들은 우리의 비전이며 꿈이다. 이미 장신대를 졸업한 몽골인 전도사가 두 명이니 그들까지 합치면 모두 7명이다. 그것도 이란, 터키, 인도, 중국 그리고 몽골이니 한결같이 실크로드의 선상에서 온 사람들이다. 역실크로드 선교를 꿈꾸는 나섬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있다. 지금은 몹시 힘이들고 고생이 되지만 고통스럽지는 않다.
벌써 몽골에 역파송 선교사를 보냈으니 역파송의 선교는 시작된 것이다. 한명씩 그들의 민족을 섬기는 선교사들이 돌아가는 꿈을 꾸다보면 기본이 좋아진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장은 돈이 무진장 들어가는 것 같아 손해보는 일 같지만 그것이 어찌 내 마음일까? 아니다. 눈은 멀리보아야 한다. 당장은 힘이 들지만 먼 미래에 그 결과와 열매가 말해줄 것이다.
몇년전에 사 두었던 양평의 땅에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구입한 땅이다. 2004년이었으니 당시는 광장동 우리 공동체 작은 건물 하나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조건에서 어떻게 그 땅을 사둘 생각을 했을까? 자그마치 13,500평이다. 내가 사는 집을 담보로 샀으니 아내는 무척이나 만류하고 막았었다. 절대로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받을 수 없다는 아내를 설득하느라 며칠이 걸렸다. 그 후 그 땅의 재산권을 모두 나섬교회에 넘기니 교인들이 무척 좋아했다. 목사가 사둔 땅을 교회와 교인들에게 돌려주었으니 당연한 기쁨이다. 그리고 매해 조금씩 땅을 일구었다. 아버지 장로님은 직접 조경을 해 주셨다. 이제 80세가 다 되시는 아버지 장로님의 수고는 양평의 성공을 예감하는 것이었다. 내 군목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내온 김대운 집사와 신점남 집사의 헌신은 감동 그 자체이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들은 스스로 결단하고 감행했다. 시간과 몸의 수고는 물론이고 더 큰 마음속의 갈등과 고민을 하나씩 누그러뜨리면서 수도승처럼 일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땅을 만들었다. 마치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척박한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것이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되었다.
사회적 기업은 곧 선교적 기업이다. 우리는 사회적 기업을 선교적 기업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선교지에 보내거나 복제할 것이다. 외국인 신학생들에게 사회적 기업의 정신과 우리의 선교적 비전을 묶어 보낼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지금도 그 생각뿐이다. 매일 밤 그 생각을 상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이제 커피 사업부를 만들어 더 큰 시너지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사회적 기업은 성공할 자신이 있다.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마음의 눈은 이미 미래의 선교지에 가 있다. 외국인 신학생들이 돌아갈 그 땅의 어느 공간에 가 있다. 그 시간 속에 내 마음을 보낸다. 함께 세상을 바꾸는 비전이다. 구체적인 선교를 생각하면서 사회적 기업도 만들었다. 그것이 성공의 전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양평의 땅을 아신 하나님이 땅도 주셨고, 헌신자들을 준비시켜주셨다. 곳곳에서 튀어 올라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금도 나는 놀라고 있다.
안목과 통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5.0의 시력을 가진 사람들과 살다보니 나도 그만큼 눈이 밝아진 것일까? 육신의 눈을 잃었지만 이제 조금씩 진짜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보고 싶다. 그래서 새 땅과 새 하늘이 열리는 그 아름다운 새창조의 세상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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