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경험한 교회가 진짜인가? 나는 수없이 이 물음을 묻는다. 그리고 결코 지금의 교회가 진짜이거나 혹은 전부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무언가 새로운 교회 공동체에 대한 미련은 남을 수 밖에... 때로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 강의를 하거나 대화를 하다보면 문득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게 맞는거야? 우리가 가는 이 목회와 신앙의 삶이 맞는거야?' 이런 생각에 이르면 자신이 없다. 아니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의심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랑받는 교회가 이런 교회라면 과연 우리 교회에 대한 희망은 있는 것인지 되묻고 싶은 것이다. 첫 번째 이 물음의 의미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일까를 묻는 것이며, 두 번째는, 교회에 대한 세상의 생각을 묻고 싶은 것이고, 세 번째는 교회 그 자체에 대한 나의 물음이다.
이제는 국가와 민족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초국가로 진입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창조하지 않고 트랜드를 쫒아가는 기업이나 국가는 결코 생존할 수 없다고도 한다. 언제까지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쫒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회의이다. 전에도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나 논리에 대하여 나는 무척이나 알레르기가 있으니 이 말에 동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내 모습일 것이다.
이미 세상에는 경계가 없어졌다. 기업이나 국가간의 경계는 물론이고 우리 주변의 삶도 경계가 없다. 과거의 잣대로 현재나 미래를 규정하거나 그 기준을 삼으려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기업간의 경쟁관계에도 어떤 경계나 기준이 없다.
과거의 자전거가 녹색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자동차나 기름가게의 경쟁자가 누구인지, 세상이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지 한참이나 생각하여야 한다.
휘발류를 파는 기름가게의 경쟁자가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또다른 기름가게가 아니라 이제는 전기배터리를 만드는 기업이다. 언제가 될런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전기자동차가 상용화될 때 기름가게들 모두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기름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모두 망한다. 물론 망하는 것을 알고 먼저 투자하고 많은 돈을 벌어놓겠다는 사장님들에게는 이 논리가 별 의미가 없겠지만 전체를 내놓고 보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주유소의 경쟁자가 자전거 가게이거나 배터리 사장님이거나 우리와는 별 관계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교회라는 공동체에 그대로 대입하다보면 끔찍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 어찌 덮어놓고 갈 수 있을까?
교회가 이대로 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회의는 두 번째이고, 현재의 교회마저도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우리 모두가 고민하여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요즘 교회에 아이들이 없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주일학교 아이들이 없어지고 있다. 젊은 청년들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모두가 어디로 간 것일까? 물론 인구 성장률이 1.19%밖에 되지 않으니 그만큼 아이들이 줄어드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아이들이 커갈수록 교회 안에 그리고 주일학교가 동공화되어가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부모들은 교회에 나가는데 그 자녀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간다. 컴퓨터나 오락을 하기 위하여 그들만의 공간을 찾아 가는 중이다. 교회에서는 여전히 다른 교회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만을 갖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지만 아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일부 전도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인 갱신과 변화 없이 교회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 말할 것도 없이 교회가 빈무덤처럼 버려진 건축물로 전락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럼에도 엄청난 돈을 들여 교회를 짓겠다는 배포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믿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심판날에는 알게 될 것이다.
교회의 경쟁자는 이제 세상이 되었다. 물론 과거에도 세상이 교회의 적이었는지, 혹은 경쟁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 세상의 변화에 대하여 교회가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뒤떨어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교회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버림받게 되어 있다.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세상이 교회를 버리는 상황에 이른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입시위주의 교육환경만 탓할 수 있을까? 지식 정보화 사회로의 엄청난 변화가 교회를 위축시켰다고 패배주의에 체념할 것인가?
대입을 앞두고 우리 부모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과연 학원에 보낼 것인가 아니면 교회에 나가라고 강요할 것인가? 여기서 엄청난 모순을 본다. 우리 큰 아이 영규가 대학입시를 앞두고 내가 겪은 딜레마다. 더욱이 한번 실패한 재수생이니 그 고민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주일 아침 예배 드렸으면 이제 학원이나 도서관에 가라"
"아빠, 주일날에 공부하라고 말하지 마세요. 저는 여기서 외국인들 사역하는데 봉사하며 보낼래요."
미치겠다. 내가 명색이 목사인데 저놈이 나한테 하는 말이니 말이다. 외국인 노동자 사역한다고 재대로 공부시키지못해 늘 미안했는데 저놈이 나한테 슬쩍 염장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주일 예배 드리고 지켰으면 학생이니 그것도 재수생이니 빨리 공부하러 가는 것이 좋겠구만 아이는 나보다 더 앞서 나간다. 아비의 마음일까, 목사의 생각일까? 무엇이 옳은 것인지 헷갈린다. 대충 선방하고 공부하러 가라고하면 들을 것이지 제놈이 나보다 믿음이 더 좋단 말인가? 두고 보자.
주일날에 외국인 노동자 사역하는 우리 공동체에서 봉사하는 것이 좋다고 버티는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기도하고 마음만 앓는 것이다. 눈이 안보이는 내게 봉사하느라 슬쩍슬쩍 보이는 아이의 분주한 모습이 귀하게 여겨지다가도 저놈이 저렇게해서 또 대학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그런 내 모습에 나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나의 믿음 없음일까 아니면 맹목적인 모습일까?
입시를 앞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라고 등 떠밀어 내보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하여야 한다고 끌어다 놓을 것인가? 물론 후자가 맞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하는가? 아니 그것을 믿는가?
세상에 타협하는 것은 신앙적이지 않다고 말하면서 나는 금새 타협하고 싶어진다. 다른 아이들에게나 부모들에게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자식 문제 앞에서는 세상적인 고민이 앞서니 참으로 한심 자체다. 나만의 고민이었을까? 아니다. 모두의 딜레마다.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원초적인 딜레마다. 세상에서 이기는 삶에 대하여 우리는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그 해 시험에서 모두 일등급으로 고려대학교에 갔다. 장학금까지 받고 갔으니 우쭐한 마음에 기분이 좋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아이의 실력일까를 생각하면 그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다 싶다. 어려운 사람들 도우며 목회한다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보신 것이다. 그렇게라도 보상해 주시니 감사한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이 자랑이 아니다. 그렇게 가는 과정에서 느낀 딜레마다. 만약 우리 아이가 그 정도의 성과를 내지 못 하였다면 나는 꼬리를 내리고 늘상 아무 소리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게 된 것은 분명히 성공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쫒아가야 할 것과 선도해야 할 것을 구별하고 결단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신있게 말하건대 우리가 포기하여야 할 것이 있고, 앞서 이끌어 가야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확실한 것은 신앙 안에서 성공하여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단 성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조금 어색하고 안맞는 옷 입은 것처럼 억지춘향 격이 아닌가. 신앙과 헌신 안에서도 분명히 성공할 수 있다는 실례를 갖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패배주의에 빠져 그대로 세상을 쫒아간다. 세상을 이끌어 가야 하는 교회가 세상의 논리와 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런 모습으로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겠는가?
일단 공부하고 성공하고 나중에 예수 믿어도 된다는 말은 누구의 논리인가? 설사 그렇게 해서 대학에 간다한들 그 중 얼마나 교회에 남아 있는가? 강요에 의해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민 아마도 다수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패와 성공은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자리는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의 자리는 내놓지 말아야 한다.
교회교육과 세상교육을 나누지 말아야 한다. 세상교육에 패배한 교회교육이라면 그 미래는 분명히 실패다. 세상교육인가 교회교육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현실이지만 단연코 그 모두를 끌어안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것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딜레마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안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둘을 함께 감당하기에 우리의 현실이 그리 녹녹하지 않다는 것이다.
먼저 교회와 세상의 경계를 없애야 한다. 우리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없어졌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거나 혹은 모르는체하고 살았을 뿐이다. 신앙과 세상을 분리하려는 교회의 이중적인 태도가 여전히 아이들의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부모들의 믿음이 그러하니 아이들에게 남모르게 가르쳐진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교회에 와도 좋다는 논리 그대로 성공의 가치가 더 앞선 것이다.
일단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우선이라는 세상교육의 가치가 교회교육을 지배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의 미래를 장담하는 기독교 교육자가 있을까?
두 번째는 세상의 변화에 대하여 교회가 쫒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쫒아가지 못하니 선도하는 일에는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다.
세상은 다문화와 새로운 유목민의 시대가 되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산업 사회의 교회교육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안에 디지털 환경은 만들어졌지만 그것에 대한 의식은 여전히 아날로그다.
트랜드를 창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변화를 뒤쫓아가기에도 바쁜 상황이니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세상을 선도하고 이끌어 가는 리더쉽의 교회를 찾기가 어려우니 안타까운 일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무인도에 버려놓은 것인가? 변화하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다. 변화란 단순한 디지털적 변화가 아니다. 기술에 대한 적응이거나 컴퓨터 기술자로의 변화는 더더욱 아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의식이 문제다.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삶에 대한 아니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컴퓨터를 못한다. 첫 번째는 눈이 안보이니 못하고, 두 번째는 아예 처음부터 별 관심이 없었으니 못한다. 기술은커녕 아예 관심이 없었으니 참으로 기가막히게 우습다. 그래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얼마나 우스운 나의 이중성이랴?
중요한 것은 의식이다. 정신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 작은 놈 영길이는 정신지체이면서도 컴퓨터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한다. 아예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들이다. 처음부터 머리가 다르게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의 뇌구조로 태어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컴퓨터를 잘한다고 그 아이가 트랜드를 만드는가? 쫒아는 가지만 그것도 어설프게 말이다. 결코 세상을 선도하지 못한다. 교회가 마치 우리 영길이 같다.
고민없이 컴퓨터를 움직이는 아이처럼 내게는 교회가 꼭 우리 영길이처럼 보인다. 정신지체 아이가 장난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기술이 아니라 의식으로 세상을 선도하지 않으면 교회는 망한다. 교회는 기술자를 만드는 공장이 아니다. 본질은 간데없고 단세포 로봇같은 아이들만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 번째는 더불어 사는 훈련이 없는 교회교육이다. 가뜩이나 집에서 홀로 컴퓨터와 사는 아이들이다. 형제도 없고 형제같은 컴퓨터만 있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독도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홀로 사는 아이들이다. 불행의 시작이다. 그 아이들만의 불행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의 불행이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이유와 목적도 없다.
이것은 개인주의를 넘어 정신병의 시초가 된다. 하나의 사회현상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병들어 가는 중이다. 다 죽는 길을 선택하였다는 말이다.
더불어 살지 못하면 죽는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다. 교회가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쳐 줄 수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이것을 위하여 제안하건데 다문화 교육이다. 다문화 사회에서 아이들이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아직 우리 세상 교육에서 미진한 다문화 교육이야말로 우리 교회안의 실제적인 프로그램으로 활용할 수 있다. 지금이 세상을 선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나섬공동체의 아이들은 다문화는 물론이고, 태어나서부터 섬김과 봉사의 도를 몸으로 체득한다. 부모들을 보면서 자란다. 봉사하고 헌신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이 신앙인의 삶처럼 여긴다. 냄새맡은 공기가 다르고 몸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를 것이다. 그 안에서 신앙의 본질을 배워야 한다. 고민하며 치열하게 세상을 이끌어 가려는 몸부림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 둘을 그렇게 키웠다. 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키운 것은 아니고, 그렇게 키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런데 지금와서 보니 그것이 얼마나 좋은 교육이었는지 알 것 같다. 하나님의 또다른 보상이다. 함께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하여 아이들은 자연스럽다. 이기적이지 않다. 혼자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당위성을 체득한 것이다.
나는 교회 안에서 살아왔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수없이 실패하고 좌절했다. 교회를 벗어나고 싶어 세상에서 방황하기도 했었다. 죽고도 싶을 만큼 힘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삶의 자리는 언제나 교회였다. 신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 실패와 좌절도 극복되었다. 패배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아이들의 미래는 다르다. 나섬의 아이들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세상에서 구별되고, 교회 안에서도 구별된 그런 부자같은 아이들이 아니라 밑바닥에서 몽골아이들과 다문화 아이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연약한 아이들과 이리저리 뒹구는 나섬의 아이들이야말로 진짜 귀족이 될 것이다. 혼자만의 부를 누리려는 천박한 부자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함을 너무도 당연스럽게 아는 진짜 귀족이다.
교회가 변화하지 않으면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은 세상은 변하는데 교회가 변하지 않음으로 더 큰 문제다. 그것보다 더 심각하고 큰 문제는 세상이 변한다고 교회가 지키고 간직하여야 할 것까지 포기하려는 것이다. 포기하지말 것과 선도하고 이끌어 갈 것을 찾아야 한다.
세상의 변화에는 민감하되, 그 안에서 본질만은 갖고 가야 한다. 고민의 자리, 실패와 아픔의 자리, 성공과 기쁨의 자리, 우리가 사는 존재의 자리는 언제나 교회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실패하고 좌절해도 일어나 그 공동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교회공동체가 세상을 바꾸는 희망의 대안이 된다. 신앙의 자리를 내놓지 않고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친다면 교회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일단 나섬이 그런 현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 교회가 내 꿈인 것이다. 우리 나섬의 아이들이 희망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그런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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