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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아내는일등나는꼴찌

 


어느 주일 오후 아내가 인터폰으로 물어왔다. 
"여보, 나를 생각하면 무슨 색이 떠오르나요?"
"노란색"

그렇다. 나는 아내를 생각하면 노란색이 떠오른다. 왜 물어보느냐고 물었더니 교인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그 남편이 생각하는 색깔로 아내를 어떻게 보는지를 판가름한다고 했다. 어디서 그런 근거를 찾는지는 모르지만 재미있는 놀이다. 남편이 아내를 생각할 때 노란색이 떠오른다는 것은 아내를 동생쯤으로 여긴다는 것이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생각해보았다. 내게 아내가 동생 같은 존재인가?
그랬다. 어쩌면 아내는 처음 만나는 날부터 나의 보호본능을 자극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었던 정목사님의 소개로 아내를 처음만난 것은 1986년 7월 23일이었다. 정목사님의 교회에 다니던 아내는 사범대학을 나와서 경기도 인천의 어떤 섬마을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서너 시간이나 가야하는 주문도라는 섬에서 처음 역사 선생을 하던 아내가 방학 때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하여 소개를 받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신대원 3학년이었고 졸업 후 군목으로 입대할 예정이었다. 나이는 한 살 차이였지만 학번은 같았으니 사실 친구 같은 사람이다. 

더운 여름날이라 남방샤쓰를 입고 머리도 헝클어진 채 그녀를 만났었다. 전혀 진지할 것 없고 조금은 시건방진 태도였다고 아내는 기억한다. 물론 이전에도 몇 사람과 사귀어본 경험이 있었던 터라 여자를 만나는 것이 그리 생소하거나 들뜨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만나보라고 하니 그저 인사치레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갔으니 그리 진지할 까닭도 없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함께 차를 탔다. 수줍음을 타며 말을 아끼던 모습만 생각난다. 자기가 살던 곳이 경기도 평택의 서정리라고 했다. 당시 아내는 안양에 살고 있었다. 집까지 가다가 서정리를 들러서 가자고 했더니 그러자고 했다. 지금처럼 네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지라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어느 시골 비포장도로를 가던 생각이 난다. 서정리까지도 못가고 그냥 안양으로 데려다 주게 되었다. 차안에서 아내에게 물었다 그냥 심심해서 물어보았던 거다.

"결혼은 언제 하실 건가요?"
"한 3년쯤 후에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었다. 3년 후에 결혼하려는 여자가 벌써부터 남자를 만나러 나왔나 싶어 짜증이 났다. 그러나마나 서로 마음이 없는 것 같다고 판단되니 더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그냥 반가왔다고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날 저녁 정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떻게 자매를 만나고서는 전화번호도 물어보지 않았느냐는 질타였다. 그 때 나는 전화번호를 알면 무엇하느냐고 되물었다. 더 만날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고 하니 목사님이 역정을 내셨다. 그래도 매너는 지켜야 한다고도 하셨다. 그러시면서 아내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했다. 다음날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한 번 더 만나자고 했다. 아내는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아내는 자신에게 전화번호도 묻지 않고 그냥 헤어지게 되자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고한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 이해는 가지만 나는 그렇게 여자를 만나는 식이었다.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안 만나고 그렇게 살았다. 적어도 내가 좋아서 만나는 것보다 여자가 나를 더 좋아해야 만나는 식이었다. 나는 여자에게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여자가 더 나를 좋아했으니 말이다. 정말 그때는 그랬다. 내가 전화번호를 주면 여자가 알아서 전화를 해서는 만나자고도 했다. 나는 절대로 여자에게 먼저 전화를 하지 않았다. 여자가 먼저 전화를 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던 내 애정관계의 원칙이 깨어져 버린 것이었다. 좋아하지도 사귀고 싶다는 마음도 없이 정목사님의 성화에 못이겨 내가 먼저 전화를 한 것이다.

두 번째 만났다. 처음보다 조금 나아졌는지 아내의 표정이 처음보다 많이 진지해 진 것 같았다. 하긴 내가 여자를 만나고 사귀는 방법이 그랬으니 아내는 자존심과 호기심이 뒤범벅이 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해도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어 호기심이 생겼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노림수였다. 아내는 걸려든 것이다.

세 번째 만나고 계속 만났다. 하지만 만나면서도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만났다. 개학을 하니 아내는 주문도 섬으로 들어갔다. 그 후 아내는 일주일에 한번 혹은 이주에 한번이나 섬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토요일이면 나는 차를 몰고 아내를 만나기 위하여 강화도 외포리 항구를 찾아 갔다. 언제나 이 여자가 나오려나 기다리면서 점점 사모함이 더해 갔다. 안개가 끼거나 바람이 불면 배가 뜨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아침부터 전화를 해대니 그 학교에서는 이 선생의 남자친구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느 날 외포리 부둣가에서 아내를 기다렸던 때가 생각난다. 멀리서는 배가 통통거리며 다가오고... 몰래 숨어서 배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다보니 아내가 배 앞머리에 서서는 나를 찾는 모습이 보였다. 두리번거리며 남자를 찾는 작은 여자의 모습이 얼마나 우습던지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나는 아내가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아내에게 결혼하자고 프로포즈도 안하고 결혼을 했다. 참으로 이상한 결혼이었다. 아내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자기가 왜 나하고 결혼했는지 자신도 모른다고 한다. 청혼도하지 않았는데 아내는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나는 군목으로 강원도 양구에 있었고 아내는 경기도광주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갑자기 아내가 보고 싶은 날이면 나는 늦은 밤이라도 양구에서 차를 몰고 서울로 달려왔다. 얼마나 먼거리인지도 모르고 그 험한 길을 달렸다. 오직 아내를 보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말이다. 아내는 무척 착했다. 반면에 나는 못된 남편이었다. 서울에 와서도 나는 집에 있지 않고 언제나 친구를 만나러 다녔고 가끔은 아내를 못살게 했다. 아내에게 공연히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 적도 많았다. 그때에도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 둘을 낳고도 나는 변함없이 세상을 방황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아내는 그때 무척이나 많이 울었다고 한다. 다시 자기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가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미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이들이 없었다면 분명 아내는 이전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했다. 

얼마 전 광나루로 이사 오신 장모님께 물어보았다. 나에게 딸을 결혼시킨 것에 대하여 어떠셨느냐고 말이다. 그 물음은 그래도 내가 괜찮은 사위가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당연히 아주 만족스럽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장모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셨다. 딸을 결혼시키고 얼마나 후회하셨는지 모른다고. 그래서 많이 우셨다고...

큰 아이 영규는 잘 자랐다. 귀엽고 건강했다. 언제나 씩씩했고 똘똘했다. 그런데 작은 아이 영길이는 태어나자마자 황달이 있었고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기우가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영길이는 정신지체 장애아이로 태어났다. 아내가 그때부터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 생각하니 나는 몹쓸 아빠요, 남편이었다. 나는 아이가 울면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나가라고 윽박질렀다. 아이를 미워한 것보다 아내를 더 미워했다. 마치 아내가 아이를 그렇게 출생시킨 원죄라도 있다는 듯이 말이다. 
아내는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아이의 특수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살아야 했다. 아내는 매일 밤마다 울부짖으며 기도를 했다. 때로는 절규하며 소리없이 울고 있는 아내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기도하기는커녕 더욱 방황했고 비인간적으로 아내를 구박했다. 이 모든 책임은 아내가 짊어져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미쳐있었다.

그리고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실명을 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음을 이제는 깨닫고 있지만 그것은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이며 절망이었다. 어느 날 나는 가출을 했고 자살을 기도했다. 물론 아직도 살아있으니 그 자살은 다시 살게되는 과정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죽음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실명은 저주이며 내 삶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 작은 아들은 정신지체 장애아로, 남편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으로 그리고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외국인 노동자 선교를 하는 목사의 아내로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분노하는 아내를 본적이 없다. 아내는 약해보이지만 정말 강한 여자다. 반면에 나는 강해보이지만 정말 약한 남자다.

아내는 어떻게 살았을까? 이것은 기적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혼을했어도 몇 번이나 했었을 내 몹쓸 성격과 끊임없이 방황하는 지랄같은 내 삶을 어떻게 아내는 참아내었을까? 잘나가는 목사가 아닌 밑바닥 목회자의 삶을 이해하고 함께 동역하려는 아내는 어떻게 이 길을 지금까지 함께할 수 있었을까? 몸이 약해 매일같이 쓰러지는 작은 놈 영길이를 데리고 특수교육을 받으러 다니던 아내는 언제나 노란색 개나리를 연상케하는 연하디연한 여자였다. 그녀는 작은 여자이지만 그 안에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어머니의 힘이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고단함을 넘어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아내는 살았을까? 그 고통의 삶을 무엇으로 이기며 살았을까?

2011년 봄, 아내는 밤마다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극동방송이 주관한 '신앙간증수기공모'에서 아내의 수기가 일등을 한 것이었다. 아내는 며칠밤 동안 간증수기를 썼던 것이다. 시상식 날 아침 나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두 아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극동방송 시상식엘 갔다. 이른 아침시간이었지만 극동방송 전직원과 수상자 그리고 가족들이 모였다. 그리고 아내는 일등상을 받았고 곧바로 수기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아내는 울었다. 나도 울었다. 모두가 다 울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아파서 울었다. 간증수기 공모에서 일등을 했다면 일등한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증이  은혜스러웠다면 그만큼 힘들었다는 말이다. 아내의 일등은 나의 꼴찌를 말한다. 아내는 나와 만나서 그렇게 고생을 했다. 나쁜 남자와 만나서 이 세상 어느 여자도 상상할 수없는 숱한 고통을 받았다. 그렇게 살아온 삶을 다른 사람은 모른다. 오직 나와 하늘만 알 것이다.

아내는 요즘 전하고는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내게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낸다. 그리고 나는 맥없이 아내의 잔소리와 핀잔을 듣는다. 이제는 역전이 되었다. 나는 무너지고 아내는 살아나고 있다. '젊었을 때에 좀 잘하지 그랬어요?' 하는 아내의 구박도 종종 날라 온다. 이렇게 인생은 변해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냥 우리는 웃는다. 그리고 나느 조금씩 아내에게 다가간다.
사랑한다고도 말한다. 당신 없이는 하루도 못산다고도 한다. 오늘도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한걸음씩 길을 걷는다. 이제야 말하지만 아내와 결혼한 것은 내 인생 최대의 축복이다. 그녀와 인생의 여정을 함께 동행할 수 있어 나는 행복한 남자다. 정말 나는 행복한 남자다. 아내가 있어 정말 나는 행복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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