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핸드폰을 개발한 기업이 모토로라이다. 우리 공동체가 살고 있는 광나루 인근에 한국 모토로라가 있었고 내가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바로 그 기업에서 일을 했다. 물론 지금 한국에 모토로라라는 회사는 없다. 오래전 회사는 문을 닫았고 그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모토로라는 2011년 초, 안타깝게도 창업한 지 불과 14년밖에 되지 않는 구글에 넘어갔다. 가장 먼저 핸드폰을 만들었지만 그 후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여 몰락하고 만 것이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 후 우리가 갖고 다니는 핸드폰은 엄청난 변화를 거쳐 지금의 스마트폰으로 거듭났다. 모토로라를 극복하고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것이 핀란드가 자랑하는 로키아다. 로키아는 목재를 중심으로 돈을 벌던 전통적인 아날로그 기업이다. 북유럽의 광활한 대지, 그 위에 자란 나무를 돈으로 만들어가던 벌목공들의 회사다. 그러던 로키아가 변신을 거듭하며 기존의 기업과는 전혀 새로운 디지털 기업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전세계 핸드폰 시장의 절반 이상을 독점하여 1등 자리를 철옹성같이 지켰던 로키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애플의 등장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만든 스마트폰이 로키아의 운명을 결정할 줄 누가 알았을까? 로키아는 장담했을 것이다. 거대한 로키아를 이길 수 있는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자만하던 그들에게 애플의 스마트폰은 블랙홀같은 것이었다. 로키아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지금도 로키아의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을 만들어 새로운 핸드폰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세계 핸드폰 시장의 강자는 로키아와 삼성이었다. 아무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핸드폰 시장에 스마트폰이 등장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로키아와 삼성이 뒤처지기 시작한 것이다. 애플이 이긴 것이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다.
지금 전세계의 핸드폰 시장은 애플이 끌고 간다. 그들이 일등이다. 그 뒤를 빠르게 뒤쫓고 있는 기업이 삼성과 엘지이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이러한 기업의 흥망성쇠에 대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변화하는 세계에서 빨리 그 변화를 이끌어가거나 뒤 쫒아가지 못하면 도태하는 것이 세상의 원리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기업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그 속도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다. 나는 얼마 전 중앙일보에서 출간한 '10년 후 세상'이라는 미래학 책을 읽었다. 지난 2001년에도 이와 비슷한 책을 출간했으며 그 후 10년을 돌아보며 다시 그 예측이 얼마나 맞았는지를 성찰하는 책이다. 그리고 다시 또 10년을 예측하며 그 10년 후의 미래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를 예상하는 책이다. 거기서 말하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상식적인 것은 저출산, 초고령, 그리고 다문화 시대의 도래다. 하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니 그리 대단한 예측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변화를 이끌거나 따라가지 못하면 사라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도 사라질 수 있다. 아니 이런 신성모독적 발언이 있나? 하며 내 믿음 없음으로 꾸짖고 싶은 이가 있어도 괜찮다. 불경스럽다고 매도해도 좋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교회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1990년 나는 군목을 전역하고 곧바로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한 달 간의 배낭여행은 내게 가장 좋은 공부가 되었다.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통째로 받아들이면서 나는 세계관이 바뀌었고 목회와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교회였다. 유럽의 교회를 아직도 교회라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그 어느 곳에서 제대로 예배하고 있으며 교제와 선교가 있는가? 그저 관광 명소로 사진찍기에 좋은 장소는 되었어도 더 이상 교회는 아니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으로부터 프랑스 노틀담사원과 쾰른대성당, 독일의 작은 시골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그저 돌덩이였다. 주일예배라고 참여한 곳에서 마주한 이들은 몇몇 노인들이 전부였다. 할머니가 반주하시고 할아버지가 찬송을 인도하고 늙은 노목사님의 알아듣지도 못할 설교가 이어졌다.
나는 몇 년 전 우리 큰 아이 영규에게 물어보았다. 왜 너는 너희학교 아이들을 전도하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그놈이 명색이 목사아들이고 우리 사역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회학도로서 얼마든지 전도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나섬의 사역이야말로 사회학을 공부하는 나름대로 생각있는 아이들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나섬이야말로 건강하고 성숙하며 한국교회의 좋은 모범이 아닌가라고 자신 있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에 나는 무척 큰 충격을 받았다.
"아빠, 우리 학교에서 교회에 나간다면 바보라고 해요."
교회에 나가면 바보라고? 이 무슨 궤변? 이런저런 소리 들어 보았지만 교회에 나가는 것이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말은 처음이다. 충격이었다. 바보들이나 다니는 교회라니 말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금 우리나라에 기독교 인구는 얼마나 될까? 2006년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총인구중 18.3%인 862만 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그 후로 교회의 성장은 멈추었거나 오히려 퇴보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기독교 인구는 우리나라 총인구중 거의 18%정도다. 그중 특히 젊은이들의 비중은 5%가 되지 못하다고 하니 얼마나 충격적인 보고인가? 전체 인구 중 차지하는 기독교 인구에 비해 젊은층의 기독교 인구는 너무도 미미하다. 앞으로 5년 후 아니 조금 나아가 10년 후의 한국교회를 상상해 보자.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여전히 여기가 좋사오니이다. 아직도 기득권과 소유의 오래된 관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은 차치하고서라도 아직도 교회 건축에 매달리는 꼴이란 얼마나 한심한가!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이기에 여전히 건축이며 성장이고 부흥이란 말인가? 한국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다. 한 번에 날아가는데 예외가 있을 수 있을까?
장차 저출산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절대적 숫자는 줄어들고 그들 중 기독교 인구의 비율은 5%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비중은 점점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점점 높아져가는 평균 연령과 초고령 사회로의 급속한 진행은 한국교회의 지형을 뿌리째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다. 젊은 기독교 인구의 감소와 초고령화, 기독교 인구의 절대적 감소는 교회의 황폐화와 공동화를 가속화 시킬 것이 분명하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흐름을 막아 설 수 없다. 이것은 대세이며 큰 흐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대해 교회의 고민이 있는가 말이다. 아무런 고민 없이 부흥을 말하고 교회 성장을 부르짖으며 조금 성공했다 싶으면 곧바로 교회 건축으로 이어지는 이와 같은 패러다임으로 과연 미래 교회를 준비할 수 있을까?
기존의 프레임으로는 예측되는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모토로라가 몰락하고 로키아가 망하는 것과 교회의 흥망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도 세상의 시장원리에 맞게 변화를 이끌거나 혹은 빨리 움직여 그 변화에 대처해야 존재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기존 교회의 관성으로는 결코 미래교회를 창조해 갈 수 없다.
나는 가끔 신학생들이나 후배 목회자들에게 이러한 말을 하곤 한다. 당신들이 목회를 하려고 할 때에는 아마도 지금의 교회는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지나친 협박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는 지금과는 무언가 다른 교회가 필요하며 그때까지 남아 있는 교회와 지금의 교회는 그 형편과 모양이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10년 후 세상과 그 변화의 물결을 주목하자. 지금이 그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위기이다. 이 기회는 위기의 물결 속에서 도도히 흘러간다. 지금이 그 물결에 뛰어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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