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볶을 주목하라!'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 주는 기업 크로스 포인트의 손혜원 대표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나섬의 커피 비즈니스를 위한 자신있는 이름이라며 뜸을 들인다. 지난밤에 나는 잠을 설쳤으리만큼 나섬의 사회적 기업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순간이다. 마음 속에서 설레임과 불안한 마음이 교차한다. 불안한 것은 혹시 손대표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만약 그 이름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다. 자꾸만 딴소리로 시간을 끄는 것이 성질 급한 내게는 곤혹스럽다. 짧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 이제 자리를 옮기자고 한다. 바로 옆 프리젠테이션을위한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슴이 뛰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내게 언제 이런 시간이 있었나 싶다. 최근 내게 이렇게 어떤 것에 대한 사모함과 기다림이 있었는가 싶다. 그러고보니 지난 23년의 목회 생활 중 이렇게 기다리고 바라던 시간이 없지는 않았다. 하루하루가 기다림이며 설레임이었다. 아무것도 보장된 것 없이 떠난 나그네 광야 생활을 하는 나와 우리 나섬의 삶은 언제나 그랬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며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보는 것처럼 믿고 살아야 했으니 그랬을 거다.
외국인근로자 선교를 시작하고 구로동에서 눈을 잃은 후, 뚝섬의 그 한없이 추락할 것 같은 지하골방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하루하루의 삶에 대하여 사랑했고 치열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생각은 궁금증을 넘어 두려움이었다.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자의 자유함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소망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바라던 자유는 있었지만 그 자유를 누리기에 내가 가진 것은 너무도 없었다. 빈털터리 목사의 삶을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내게 이런 삶은 너무도 생소하고 기이했다.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했었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배움도 얻었지만 그만큼 고통은 가혹했다. 한 여름의 지하는 언제나 곰팡이와의 전쟁이며 습기와의 동침이다. 습기가 어찌나 심했던지 아침에 내려간 지하실에서 저녁때에 나오는 내 몰골은 물에 젖은 생쥐같은 모습이었다.
곰팡이 냄새는 내 옷과 피부에 찐드기같이 붙어 다녔다. 비가 오는 날이거나 날씨가 우중충한 날이면 그 지하의 무덤같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마치 더 이상 지상으로 다시 올라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서러움 같은 한으로 채워졌다. 혼자 앉아 하루를 사는 어느 날 울컥 눈물이 났다.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하는 소리가 뱃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절규로 묻어나왔다. 고독이 싫었고, 가난이 싫었다. 그때는 그 외로움이 얼마나 심했던지...
오갈데 없는 나그네와 살아야 하는 것은 또 그만큼의 고독을 곱하는 삶이다. 고독한 자의 외로움이다. 외로운 자를 바라보면 나는 더 고독했다. 누가 이 고독에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를 기도했었다. 외로움에 떨며 살아가는 나그네들에게 내 고독이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독해본 사람만이 외로운 자를 안다. 나는 그 지하실에서 아무도 없는 고독을 친구처럼 마주했다. 그리고 그 외로움에서 삶을 배우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그것밖에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밥이 없어 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점심이 점하나 찍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 사람은 아내다. 내 까탈스러운 입맛과 식성에 질린 아내의 훈계다. 그러나 진짜 나는 마음에 점하나 찍으면서 살았다. 점심이면 갈 곳 없는 나그네들이 내 허름한 지하방에서 떠날 줄 모르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배가 고파 몇 잔의 물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라면은 점하나 찍는 정도가 아니라 만나였다. 얻어먹는 김치 아니 때로 몰래먹는 김치는 언제나 나를 도둑처럼 만들었다. 나그네들에게 조금 더 맛있는 라면을 주려니 김장독을 수없이 드나들어야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외국인들과 나가라고 통보하는 그 교회 장로님들에게 조금은 섭섭했지만 왜 그리 내 마음은 자유로웠는지 모르겠다. 한 일년 쯤 더부살이 하던 교회에서 쫒겨나는 것이 아픈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이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의 자유다. 그래서 정말 나그네가 되었다.
그리고 또 지하실에서 6년을 살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리고 지금은 작지만 우리의 건물이 생겼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고 있다. 우리 공동체의 건물은 가장 효율성이 높다. 단 하루도 예외없이 사람들에게 개방하며 모두에게 소중한 집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몽골학교에서부터 교회까지, 그리고 나그네들의 쉼터는 물론 밥집까지...
우리의 기다림은 언제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바램이었다. 하루를 지내는 최소한의 먹거리와 잠잘 곳, 그리고 함께 나눌 소망의 이야기거리면 되었다. 생존을 위한 바램과 욕심을 채우려는 바램은 그 질부터 다르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생존의 끝자락에서 바라는 것이 어떻게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려고 바라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나그네의 삶은 하루살이다. 더 가지려 해도 넣을 주머니가 없어 그렇고, 하늘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고 썩여 버렸으니 신앙적으로도 그래야 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준 채움과 남김이라는 것이 나그네의 삶에는 사치다. 그들은 갖지 못함으로 자유하고 진짜 나그네가 된다. 나그네가 가진 것이 많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으니 그 때부터 그는 나그네가 아닌 정착민이 되는 것이다.
최소한의 삶을 위한 기다림으로 살았던 내게 언제인가 새로운 기다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타락한 것인가. 이 기다림은 아직 잘 모르겠다. 타락일지 아니면 새로운 공존의 삶을 위한 바램일지 아직은 미지수다.
나섬공동체가 이룬 역사 가운데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회적 기업이다. 나섬의 사회적 기업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매우 중요한 사역이다.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공하여야 한다. 사회적 기업을 시작한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우리는 몇가지의 아이템을 선정하여 사회적 기업의 틀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커피 사업부이다. 가배두림의 이동진 대표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또한 그 시점에서 정말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으니 크로스 포인트의 손혜원 대표를 만난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의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손대표다. 기업에서 새로운 물건이 출시될 때마다 그 상품의 이미지에 맞는 이름을 지어주는 창조자이다.
손대표의 한마디 한마디에 온 신경을 고추 세웠다. 과연 무슨 이름을 지어줄까? 하나님이 아담에게 모든 창조물의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심으로 창조가 완성된 것처럼 손대표는 우리에게 아담같은 존재였다.
"커피볶(COFFEE福)입니다"
'커피볶'이란다. 갑자기 체면에 걸린 사람처럼 멍한 느낌이다. 조곤조곤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을 하는 손대표의 이야기를 듣는데 눈물이 난다. 느낌이 이상했다.
성서의 팔복을 읽으면서 볶(福)을 설명하고, 그러면서 커피 볶는 냄새가 나고...
비즈니스와 선교를 분리하지 말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바리스타와 선교사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제는 선교가 곧 비즈니스며, 바리스타가 곧 선교사라고 당당히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 나다. 까페와 교회도 하나라고 말했다. 교회가 곧 까페다. 이제 커피가 곧 복음이라고도 이야기 했었다. 커피가 곧 복이다. 그러니 '커피볶'은 당연한 이름이 아닌가?
나하고 손대표의 마음이 통한 것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다. 나섬의 사회적 기업을 만들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정말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커피볶'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선교지에 던져주는 새로운 선교의 이름이다. 세계 곳곳에 '커피볶'이라는 이름이 새겨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물어올 것이다. 이 이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복을 마시게 하고 싶다.
나의 새로운 기다림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하루를 살기위한 기다림이며 바램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모든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과 다 함께 오래도록 살기 위한 기다림이다. '커피 볶'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기다림이다.
사회적 기업 나섬의 커피볶을 주목하라. 세상을 바꾸고 모든 이들에게 소망이 되는 새로운 형태의 커피 사업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성공한다. 이것은 억지가 아니라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다. 이미 되어진 것을 찾아낸 것뿐이다. 하나님이 이미 창조해 두셨던 것을 발견한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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