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자매와 이민국 앞에서 헤어지던 날
H 자매는 28살이다. 북한 압록강 근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살다가 17살에 압록강을 넘어오자마자 바로 인신매매의 덫에 걸려 11년 동안 알지도 못하는 중국인 남자의 아내가 되어 8살과 7살의 두 아이를 두었다. 그러나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오기 위하여 자녀들을 두고 떠나온 여성이다.
내가 이곳 센터를 방문하여 주일예배를 인도하던 날 유난히 말이 없고 우울하게 앉아있던 자매가 H이다. 그 자매는 키가 컸는데 나중에 알보고니 170cm라 한다. 북한 여성의 일반적 키에 비하면 굉장히 키가 큰 자매다.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 키의 여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북한에서는 보기 드문 장신이다.
말을 못하는 건 지 안하는 건 지 그냥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던 H는 어쩌면 북한 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중국에 와서 오랫동안 시골에서 농사 일과 노동 일만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다가 떠나온 그 자매는 세상 물정은 물론이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북한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동생 한 명만 살고 있다 한다. 그마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 한다. 서울에 온다 해도 연이 닿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하니 정말 외롭고 대책 없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생겼는데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 따지고 싶을 만큼 가슴이 아팠다.
2024년이 시작되기 전인 2023년 12월 27일 베트남을 거쳐 라오스를 넘어 메콩강을 건너 이곳에 올 때 몸에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데 아뿔사! 임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을 떠나올 때는 모든 것을 잊고 새 출발을 하리라 마음 먹었건만 모든 계획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사랑하지도 않는 중국 남자의 아이를 또 몸에 낙인처럼 붙여온 것이다.
겨우 28살의 젊은 나이다. 아니 어린 나이다.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나이던가. 그런데 이미 중국에 두 아이를 뒤로하고 떠나온 여성이다. 새 출발을 결심하고 가슴 아픈 기억과 상처를 중국에 묻고 떠나왔다. 그런데 다시 임신을 하다니 황당하고 아프다. 그녀는 언제나 이 무거운 족쇄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단 말인가!
중국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3개월간 신앙훈련을 하기로 약속한 자매들의 하루하루는 오직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자매들은 기독교와 예수 복음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고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성경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국에 가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혹시라도 예수 신앙을 갖고있는 사람도 신앙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은데 그곳에서 만난 탈북 자매들은 신앙이 전혀 없는 하얀 백지 그 자체였다. 센터에서는 깨끗한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마음으로 그들의 영혼과 마음에 예수의 모습을 그린다. 복음이 갖는 가치와 예수의 삶과 말씀을 새겨넣기 위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온 삶을 헌신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제3국에서 선교 캠프를 운영하는 장 목사와 부인 김 목사 내외의 삶과 만남도 기가 막힐 정도로 영화 같다. 그들의 사역은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20년을 넘도록 한결같이 탈북자 사역에 헌신해 왔다.
나는 지난 12월에 그들을 처음 만났고 이번이 두 번째다. 두 번째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깝게 여겨졌고 사랑하는 동생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파송 단체 없이 사역하던 김 목사를 우리 공동체에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 공동체의 파송 결정도 알리고 파송 전 한 번 더 만나기 위해 1월 중순 아내와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곳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했다. 여호수아서의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서술한 본문으로 '강을 건넌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히브리'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르는 고유명사 같은 것이다. 히브리는' 하비루' 혹은 '하피루' '이브리'라는 말과 관련이 있는데 그 의미는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강을 건너온 노예들이 히브리 노예들이다.
그 말은 다시 '경계를 넘은 사람들' 혹은 '떠돌이'라는 말과도 연관되어 사용하는데 어쨌든 천한 계급의 약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그러니 히브리 사람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이 말은 '강을 건너 경계를 허물고 도망쳐 나온 떠돌이 노예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일 게다.
여기 모인 탈북 자매들도 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사람들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조·중 국경지대인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광야에서 40년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중국에서 광야의 삶을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다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이들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고 다시 메콩강을 건너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내가 캠프를 방문했을 때는 10명의 탈북 여성이 성서를 배우고 미래를 설계하는 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일 아침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우리는 함께 울고 웃으며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나의 손을 잡아주며 불쌍하게 바라보는 자매들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후에 그녀들은 어떻게 해서 시력을 잃었는지, 눈이 안보이는데 왜 여기에 왔는지를 물었다. 이상했던 모양이다. 자신들보다 내가 더 불쌍한 인생처럼 여겨졌는가 보다.
H 자매도 그들 속에서 나를 보았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나를 데리러 온 장 목사는 임신한 H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그 자매를 먼저 이민국에 데려다주어야겠다 한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갈 수 있고 태중의 아기도 산모의 건강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일에 이어 월요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내게 시간이 주어졌다. 성서적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당신들이 야곱이며 요셉이라 했다. 야곱과 요셉은 모두 나그네다. 부모와 형제들의 품을 떠나 새로운 미지의 세상에서 살아야 했던 나그네였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 속에서도 믿음의 가치를 붙잡고 살았으며 결국 꿈꾸었던 성공과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요셉은 자기만의 성공이 아니라 두고 온 형제와 아버지까지 구원하는 구원자의 삶을 살았으니 얼마나 위대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당신들도 그렇게 살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이제부터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자. 그렇게 살아 후일 당신들의 자녀들과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구원시키자. 이렇게 말하며 손을 잡고 기도할 때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팠다. 그러나 아픔을 느끼는 순간 다시 감사가 터졌고 더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었다.
H 자매도 그 자리에서 조용하게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중국에 두고 온 두 자녀와 북에 남은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살아야 하는 불확실한 미래를 도와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장 목사와 메콩강에 가기로 했다. 메콩강을 넘어온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는 것이다. 조금 더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었다. 숙소로 장 목사가 나를 데리러 왔다. 뜻밖에도 그 차 안에는 H 자매가 타고 있었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그녀는 많이 울었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다. 센터에서 신었던 슬리퍼와 작은 가방 하나가 전부다. 북에서 나올 때는 무슨 신발이었을까? 그런데 지금은 신발이 없다. 슬리퍼를 신고 나온 그녀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난다.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신발이 젖고 더러워져 신발을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슬리퍼를 끌고 나온 것이다. 가다가 신발을 사야 했다.
그녀가 가야 할 이민국은 메콩강 주변에 있었다. 라오스와 미얀마 사이의 골든 트라이앵글이라 불리는 지역의 작은 도시다.
점심 때에 한국 식당을 찾아갔지만 이미 예약된 손님들이 있어 우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골프 치고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먼 곳까지 한국인들은 놀고먹고 즐기러 온다. 그러나 H 자매는 놀러 온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고 산을 넘다가 신발을 못쓰게 되어 형편없는 슬리퍼를 신고 이민국으로 가는 중이다. 좋아하며 웃고 떠드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우리는 말이 없다. H 자매도 말이 없다. 제대로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하고 먼 거리를 걷고 넘고 도망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다시 이민국 보호소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5주간의 조사와 재판을 받고 벌금을 내고 한국행 임시 여행허가서를 받아야 한국에 갈 수 있다. 한국에 가면 즉시 국정원으로 가서 두 달여 조사를 받는다. 그리고 다시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서 수개월을 지낸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갈 곳이 없다. 슬리퍼와 작은 가방 하나를 든 H 자매를 위해 기도한다. “주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제발 이 불쌍한 딸을 구원해 주십시오. 제발... ”
치앙라이에서 찾아 들어간 식당에서 H 자매는 된장찌개를 시켰다. 그러나 얼마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는다. 태중의 아기도 배가 고플텐데 자매는 밥을 먹지 못한다. 긴장하고 힘들고 아파서인지 밥을 먹지 못한다. 이민국으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차를 탔는데 말없이 밖을 보다가 구토가 나는지 창문을 열어놓고 잠이 들었다. 꿈을 꾸는가? 무슨 꿈일까? 북에 두고 온 가족일까 아니면 중국에 두고 온 두 자녀의 꿈일까?
나는 계속해서 묻는다. “하나님 왜 이러셔야만 합니까? 누구는 골프를 치러 여기까지 오고 누구는 슬리퍼 하나를 끌고 이민국 보호소로 가서 수개월을 더 걸려야 알량한 자유를 얻게 되다니요?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왜 이 딸아이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또 임신해 여기까지 그 멍에를 끌고 와야 합니까? 이것이 은총입니까? 아니면 저주입니까? 누가 이 고통을 저 딸아이에게 주었습니까? 주께서 이 고통에 대하여 답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의 잘못입니까? 이 딸의 잘못입니까? 이 고통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왜 잠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산 넘고 강 건너 여기 가지 임신한 몸으로 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왜입니까? 왜?”
신발이라도 하나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더 늦으면 시간 안에 이민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무슨 황당한 모순인가? 이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이민국 보호소는 감옥이다. 소위 비자가 없이 체류하는 이들이 마지막에 가는 감옥이다. 그런 감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 한국에 갈 수 있으니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신발이 없다. 지금부터 더 먼 여정을 떠나야 하는데 H 자매에게는 신발이 없다.
그래도 신발은 신겨야 한다. 한 켤레의 신발이 그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민국 앞 쇼핑센터가 보였다. 아내가 신발을 사주기 위해 자매를 데리고 뛴다. 우리도 뒤를 따라 빨리 걷는다. 빨리 이민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내와 자매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 더 늦으면 문이 닫힐 수도 있다. 문이 닫히면 한국으로 가는 시간을 더 늦추어야 하니 하루라도 빨리 그 안으로 보내야 한다.
아내를 만났다. 자매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내에게 신발을 사주었냐 물으니 계산을 하려 하는데 하필 휴대폰 결제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 사주지 못했단다. 결국 자매가 갖고 있던 돈으로 신발을 샀다 한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울고 있다. 그날도 많이 울었는데 지금 또 눈물이 난다. 신발을 사주지 못해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아니다. 신발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사랑한다고 말만하고 살았다. 사랑에는 핑계가 없어야 한다. 그 순간 왜 계산이 안되었는지 너무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다. 이민국 앞이다. 장 목사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자매를 위하여 기도해달라 한다. 손을 잡았다. 눈물이 터졌다. 나는 이 딸아이를 위하여 무엇이라고 기도를 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