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속에서 통일과 평화라는 담론을 고민하며 북한선교를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군목을 전역한 1990년이었다. 그해 9월 나는 전역과 동시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독일통일의 현장을 보고 싶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독일통일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다음 해인 1990년 봄에 이뤄졌으므로 독일의 통일 현장을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친구가 공부하고 있던 독일의 수도 본에서 며칠을 묵고 독일의 여러 지역을 돌아보면서 분단으로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 민족의 현실을 생각하며 고민하게 되었다.
1992년부터 시작한 나그네 섬김의 사역은 조금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게 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문제는 내게 미완의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 후 어느 날 1999년 2월 잘 아는 장로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중국과 북한의 변방인 두만강과 동북 3성으로 탈북자들과 꽃제비라 불리는 탈북 고아들을 만나는 여정을 떠나자는 것이었다. 그 장로님 일행과 요녕성 심양을 거쳐 길림성 연길, 용정과 삼합, 두만강 일대를 거쳐 백두산에 올라가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일정이었다. 연길에서는 조선족 목회자들을 위한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저녁과 밤에는 그곳에 들어온 탈북자 가정을 찾아갔다. 연길 인근의 어느 한적한 곳에는 북한에서 온 노동자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들이 준비한 저녁 식사를 했던 것도 기억난다.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는 그들은 북한의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공부한 인텔리들이었으며 매우 진취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몰랐고 지금 생각하면 겁 없이 만나고 다닌 것이었다. 북한은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는 엄청난 빈곤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 상황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들과 꽃제비들이 차고 넘쳤다. 가는 곳마다 꽃제비들이 우리를 따라다녔으며 그들은 차마 바로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거지꼴이었다.
나는 1987년 초임 군목을 강원도 양구 21사단 펀치볼마을에서 했다. 그곳은 최전방 부대였으며 제4땅굴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철책부대였으므로 나는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북한군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이 탁구를 할 때에는 작은 탁구공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두만강에서 바라본 북한은 강원도 양구 가칠봉에서 본 것보다 더 생생했고 가까웠다. 몇 걸음이면 금방 강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저 너머 북한에서는 북한병사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면 들릴 수 있을 만큼의 거리였다.
그다음 해인 2000년 3월 나는 다시 중국에 가게 되었다. 그때에는 내가 주동이 되어 우리 교단 목회자들을 이끌고 그곳에 다시 간 것이다. 젊은 목회자들은 두만강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고 우리의 분단이 가져온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중국 변방을 다녀온 후 우리는 곧바로 '한국교회 선교 정책 연구소'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그 이름도 내가 지은 것이다. 그 조직은 북한선교와 통일, 한반도 평화를 연구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선교조직이었으며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매년 중국과 북한 접경지대를 두루 다니기 시작하였다. 가장 서쪽인 단동에서 지안과 장춘 백두산을 넘어 도문과 훈춘 그리고 조·중·러의 접경지대인 방천까지 수년을 그렇게 다녔다. 서해부터 동해까지 백두산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며 북한선교와 통일 아니 평화만이라도 우리에게 주어질 그날을 꿈꾸며 살아왔다.
1999년 몽골학교를 세우고, 2001년 몽골문화원을 설립하며 나는 몽골 사역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몽골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탈북자 한 사람이 우리 선교회에 찾아와 나를 찾으며 도와달라 했다는 것이다. 당시 울산 평강교회의 허 목사님이 중국 도문에서 탈북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에게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까지 올라오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를 6개월 동안 보호하며 도와주었고 그는 무사히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한 사건이었다. 탈북자 문제를 경험하며 비로소 북한선교의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탈북자 난민캠프를 설립하자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과 오고 가며 나누었다. 몽골의 국가인권위원장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몽골인 인권 실태조사를 하고 있을 때 그를 도우며 그에게 몽골에 들어가는 우리 동포 즉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매년 몽골을 드나들며 몽골의 지도자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교제할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몽골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한다면 몽골에는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이며 국가의 경제와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는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2023년 10월 몽골 전 부총리이며 4선 의원인 테르비시다그와 의원을 초청하여 '한반도 평화와 몽골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열었다. 그날 테르비시다그와 의원과 내가 각각 발제를 하였다. 그 세미나는 내게 몽골이 새로운 북한선교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2018년 이미 울란바토르 외곽 거르더크 지역에 경기중앙교회의 후원을 받아 몽골평화센타를 건축하였다. 이 평화센터는 탈북자 지원 사업을 위한 베이스 캠프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었다. 200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시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계속하여 우리의 사역은 멈추지 않고 진행 중이다.
그동안 우리 공동체에서는 '한반도 평화선교 네트워크'라는 단체를 조직하였고 몽골에 '평화경제공동체'를 세우는 비전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몽골과 북한 그리고 우리 남한의 강점을 모아 새로운 평화경제의 모델을 만들고 탈북자 캠프를 설립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뿐아니라 2023년 12월에는 제3국에 있는 탈북자 선교캠프를 방문하였다. 2024년부터는 그곳의 탈북 목회자를 우리 공동체에서 정식으로 파송하여 탈북자들을 섬기는 일에 동역하기로 하였다.
이렇듯 북한선교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몽골과 태국에서 탈북자 사역을 하고, 몽골에는 통일과 평화를 위한 '평화경제공동체'의 모델을 세우는 일까지 우리의 사역은 계속될 것이다. 이 사역을 위하여 나섬이 북한선교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왜곡된 북한선교의 현실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하다. 정직하게 지속 가능한 북한선교의 길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우리는 북한선교가 곧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라 고백하며 한국교회에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