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이 장애아이로 태어나고 내가 장애인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내 주변에 그런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본 적은 있지만 그것이 내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고통이 내게 닥쳐왔을 때 나는 미칠 것같은 분노와 절망감으로 쓰러지고 무너졌다.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고 나의 남은 삶은 불행과 비극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 갔을 때 주께서 나를 살려주셨고 내 삶과 사역의 근거를 말씀해 주셨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안보이는 고통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누가 이 고통을 알아줄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오롯이 그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당사자만이 안다. 매일 고통의 신음 소리는 내 가슴을 치며 나를 아프게 하고 속으로 얼마나 눈물을 삭히며 살아야 했는지!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너무도 정확하고 놀라운 것임을 깨달았다. 얼마 전 호주에 갔을 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오랫동안 호주와 북한을 잇고 북한선교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 온 이들을 만난 것이다. 그들 중 어떤 목사님은 몇 년 전 우리 공동체에 방문한 분이었고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다 알만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때가 이르니 그들이 나와 북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주님은 그렇게 새로운 길과 비전을 보여주셨다. 내 아들이 장애아로 태어났고 내가 장애인이 되었으니 나보다 더 장애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몽골에 장애인 재활을 위한 공동체를 세우고 그것을 북한의 장애인 사역으로 잇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을 도울 사람들도 나왔다. 내가 결단하면 될 일이다. 내가 오늘의 몽골과 북한 장애인 사역의 통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장애인 문제는 이념이나 정치적 거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질의 원초적 고통을 나누며 섬기는 사역이다. 예수께서 그러하셨듯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여기에 어떤 정치적이며 이념적인 문제가 전제될 것은 아니다.
먼저 몽골 장애인 사역부터 시작하려 한다. 장애인 재활을 위한 카페를 만들어 몽골의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일자리가 가장 좋은 복지이며 선교의 길이다. 그것이 모델이 된다면 그다음 북한의 장애인들을 초청하여 보여주고 북한 장애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뒤에서 도울 것이다. 몽골을 앞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주께서 하실 것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이 멋진 사역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주님은 나와 내 아이가 장애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는 모든 계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