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조금 강한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떨어지고 강한 바람이면 가지가 부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 그 나무의 뿌리까지 뽑아내지는 못한다. 하긴 때로 너무 강한 바람이 불면 약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죽기도 하지만 말이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바람이 불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사춘기 소년 때에도 바람은 불었고 청년이 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부모가 되어서도 바람이 부는 삶을 살았다. 중년의 나이를 먹고 이제 늙어가는 초로의 노인이 되어가면서도 나는 여전히 바람 부는 삶을 살아간다.
바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불어와 나를 흔들어 대는 세상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 뿐 바람은 사실 내 안에서 불어오는 유혹이며 그것으로 아파하는 흔들림이다. 바람은 내가 살아있는 한 실존임을 증거하는 현상이며 때로 그 바람이 내 본질을 알게 하는 은총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성서에서 가장 많은 바람의 흔들림으로 방황한 사람은 아브라함과 다윗이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그녀의 몸종이었던 하갈과 동침함으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후일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영적 시조처럼 받들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채 아브라함은 그렇게 바람을 피웠다. 다윗은 자신의 부하였던 우리아의 아내와 간통함으로 평생 그 바람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바람으로 후일 예수가 태어났으니 그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바람의 흔들림이 세상을 바꾸거나 역사를 만드는 경우는 종종 있다. 우리는 그 바람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인간의 도덕적 잣대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유다의 며느리와 유다의 동침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유다에게 일어난 일시적 바람은 그가 미처 알지 못하는 중에 일어났다. 다말이 시아버지임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접근했으니 유다에게는 책임을 묻고 싶지 않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이었다. 그 바람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나중에 그들의 바람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우연이 필연으로 느껴지는 순간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 도덕이 절대기준일 수도 없다. 도덕 너머에 계신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일이다. 어떤 도덕적 허물도 때로 그것으로 세상을 이끌어가시는 그분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바람을 마음으로 느끼며 고민하고 방황할 뿐이다. 완벽해 지려 하지 말자. 때로 불완전함에 위로를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