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해도 아프다. 우리 나섬의 신 목사 부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이리 아플 줄 알았다면 그동안 더 잘해 줄 것을 하면서 스스로 자괴감에 빠진다. 신 목사가 뜻하지 않게 루게릭이라는 희귀병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인 윤집사가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대체 무슨 이유와 섭리가 있기에 주께서 이토록 가혹한 고난을 이 가정에 연속으로 주시는 것일까? 루게릭은 우리나라에 38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희귀병이며 발병의 이유도 모르고 치료 방법도 없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가까이서 지켜본 바로 신 목사 부부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성실과 정직함으로 공직을 수행하고 있는 윤집사와 뒤늦게 주님께 헌신하여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이주민 사역을 해 온 신 목사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이며 모범적인 신앙의 가정이었다. 나섬에 오기 전 해외 봉사단원으로 저 먼 도미니카에서 몇 년 동안 선교사역에 헌신한 가정이기도 하다. 신 목사 부부의 삶은 정말 행복해 보였기에 이 세상에서 무슨 걱정이 있느냐며 부러운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상상도 못할 고난이 이 부부에게 찾아오면서 나는 담임 목사로서 그리고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전화를 하여 기도를 하는 것이 전부다.
1994년 5월, 나는 눈의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에 내 나이 33살이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게다. 26살에 목사가 되어 군목으로 입대한 후 짧은 복무기간이었지만 소중한 경험을 하였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제대 후 젊은 호기로 찾아간 구로공단에서 나는 치명적인 병을 얻었다. 게다가 작은 아이가 지적 장애 1급이라는 판정을 받아야 했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괴로웠다. 목사의 신분임에도 죽음을 선택하려고 했었다.
죽음의 순간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나는 고난의 긴 시간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나는 아직도 고난의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아프고 괴롭고 힘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쑥 솟구치는 분노와 절망감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모든 아픔을 이기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구나.’ 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아직도 아프고 괴롭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의 깊은 절망과 끝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내본 사람만이 그 막막함을 이해할 수 있다.
신 목사 부부가 당한 그 고난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현실을 누가 이해하고 공감하며 위로할 수 있을까? 사실은 나 또한 전적으로 그들의 고난에 공감할 수 없으며 나의 위로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실은 나도 그랬다. 고난은 오롯이 고난당한 자의 몫이며 누구도 그 고난을 나누어 짊어질 수 없다. 고난은 그 가족과 그 자신만이 견디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프지만 살아간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열정으로 말이다. 때로는 일에 미친 사람처럼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려간다. 일하면서 아픔도 잊고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라며 의지와 오기로 살아간다.
거의 매일 하나님께 묻는 물음이 있다. ‘하나님! 저는 언제까지 이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나요?’ 하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직접 답을 듣지는 못했다. 다만 물음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오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께 묻는 물음이 다이지만 그 물음만으로도 눈물이 흐르고 위로를 받는다. 인간은 묻는 존재다. 특히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는 물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다. 오늘 나는 다시 묻는다. ‘왜 하나님은 신 목사 부부에게 이토록 큰 고난을 주십니까?’ 그 물음 속에서 신 목사 부부에게 진정한 위로가 있기를 기도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