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듣는 말 중 하나가 '나섬이 무슨 뜻이냐?'는 물음이다. ‘나섬’이라는 말은 ‘나그네를 섬긴다.’ 는 뜻이라 알려 주면 그때서야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30여년을 나그네와 함께 살아온 내게는 그리 이상할 것도 생경할 것도 없는 말이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게 들리는 모양이다.
우리 교회 이름이 ‘나섬’이라는 것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 호감 가는 이름은 아닌 듯하다. 교회 이름 앞에 붙여진 나섬이라는 말은 때로 십자가를 짊어져야하는 의미인 것 같다. 누가 무거운 짐을 지는 교회를 좋아하겠는가?
우리 공동체는 작은 자들을 섬기는 교회다. 그리고 그들을 품으려는 교인들의 모임이다. 당연히 작고 보잘 것 없으며 때로 나섬이라는 이름의 무게 앞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곳이다. 나는 나섬의 목회를 하며 많은 생각을 한다. 처음 신학교에서 목회자의 길을 선택할 때에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예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은 어둡고 고통스러움 그 자체였기에 작고 연약한 사람들은 더욱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다. 군부독재의 시절이었으니 자신의 생각을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도 없었다. 정의를 말하면 안 되는 시절이었다. 나는 그것을 고민하며 바라보았고 부자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그 시대를 몸으로 경험하였다.
그때에 나는 예수를 따라가는 삶은 부자유가 아니라 자유이며 고통이 아니라 희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예수 제자의 삶이라고 고백하였다. 고통 받는 자들의 친구로 사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이었다. 작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갈릴리를 떠나지 않았던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나도 목사가 되고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아야 했다. 짧은 군목 시절을 마감하면서 나는 결심했다. 나는 내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헤매었다. 한 달간 유럽으로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어디가 내가 가야 할 곳인지를 물으며 길을 걸었다. 길을 걸으며 예수께 물어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내게 가르쳐 주셨다. 길 위로 올라가라 하셨다. 길 위의 삶을 가르쳐주셨다. 성 쌓는 삶이 아니라 길 위의 삶이 내가 살 길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급기야 찾은 곳이 나섬의 목회지였다.
‘나그네’였다. 나섬은 나그네를 위한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나는 그것을 찾았고 그 공동체를 선택했다. 내게는 운명이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길 위의 삶이었다. 길 위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었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 안에서 오랫동안 외롭게 살아야 했다. 그곳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고 급기야 내 몸에 고난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눈을 잃었다. 고통의 자국이 내 육체와 영혼에 선명하게 찍혔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지금도 나는 고통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산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요즘도 나를 괴롭힌다. 죽는 날까지 이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 나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섬은 내게 운명이지만 거부하고 싶을 만큼 힘들고 아픈 자리다. 그러나 더 깊이 묵상하면 이 자리가 복된 자리임을 확신한다. 고통을 말하지만 그 고통 너머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는다. 나섬은 존재 자체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이들의 공동체이기에 나섬을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나섬의 교인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나섬을 찾아준 것만으로도 놀랍고 감사하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지만 그래도 작고 부족한 나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있음이 감사하다. 나섬이 있음으로 나는 행복한 목회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