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쓰레기장에서도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찾아보라 하셨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거친 광야에 멋진 미학이 숨겨져 있다고 하셨다. 그 영향 때문인지 나는 광야를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광야의 목회를 즐기며 살아왔다.
미술선생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생각한다. 하나님은 최고의 예술가시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은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창조적 미학의 극치를 보여주신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과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던 라합, 모압 여인이며 과부였던 룻과 같은 여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야기 등 성서 속에는 버려진 돌들이 멋진 작품으로 변하는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갈릴리의 어부와 세리 등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뽑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성서는 버려진 돌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머릿돌이 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이야기들이 성서 안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말씀을 믿고 또 확신하며 목회를 하고 나그네를 섬기며 살아가는 이유는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섬’은 버려진 돌들로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하나님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동체다.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여성들, 난민과 장애인 그리고 탈북자와 같은 가장 작고 연약한 이들이 하나님나라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나는 성서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지를 읽는다. 예수께서는 그 이야기를 직접 자신의 몸으로 만드신 분이다. 또한 예수는 갈릴리 어부들을 앞세워 병든 자와 장애인, 세리와 죄인, 창녀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뤄가셨다.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최고 구성원이며 가장 작은 자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코로나의 위기 앞에서 다시 하나님나라를 묵상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갈 것인가? 세상의 돈과 권력, 그리고 명성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까? 화려한 예배당과 거룩한 예배와 수많은 사람들로 만들어 갈 수 있을까? 하나님나라를 구성하는 요소는 세상의 가치나 기준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완성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드러나며 성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성서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나라 구성원의 공통점은 모두가 작은 자들이며 연약하고 자랑할 것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의 이야기 거리를 갈릴리에서 찾으셨다. 예루살렘의 부자들과 잘난 사람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게서가 아니라 갈릴리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셨다.
그와 똑같이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는 지금 ‘나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터키에 있는 호잣트, 인도의 판카즈, 베트남의 투하와 몽골의 보르마 그리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아들 영길이가 바로 하나님나라의 주인공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고의 예술가이시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열등감으로 힘들어 하고 광야 같은 나섬을 아파한다. 언제쯤이나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러다 오늘 아침 문득 여기가 복된 자리임을 깨달았다. 여기가 바로 내 존재의 자리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