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마로 분칠한 예수를 믿는 것이 기독교인가? 아니면 민낯의 화장하지 않은 예수를 믿는 것이 옳은가? 조금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질문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하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는 예수라는 인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교리화 하고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소개해왔다. 어쩌면 교리로 잘 정리되고 화장시킨 예수를 믿도록 교인들을 가르치고 교육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교회가 오랫동안 기독교라는 종교 속에 교인들을 의식화시키고 붙잡아 놓는 전략이었다. 성서속의 예수가 아닌 교회의 문화와 제도를 지탱하기 위하여 예수를 구미에 맞도록 요리하고 교리 속에 가두어 놓은 것이다. 적어도 교회의 역사는 그것을 주도해왔고 교리화 한 예수를 절대화 시켜 놓았다. 그래서 신학이란 그런 예수를 가르치고 믿으라고 변증하는 학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시 날 것의 예수가 그립다. 목사가 된지 어언 34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설교하는 목사로 산다는 것이 참 복된 삶이며 설교자로 산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그러나 때로 과연 나는 진짜 예수를 설교하고 가르치는지에 대하여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성서가 가르치는 예수가 아닌 교회가 만든 제도 속의 예수를 변증하며 설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오늘의 교회가 진짜 예수를 믿는 집단인가에 대한 본질적 회의를 갖게 하였다. 오늘날 세상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비춰지는가? 그 물음은 매우 민감하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곧 교회의 현실과 교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교회는 이미 모든 이들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마저 교회에 다니는 것에 회의가 든다고 한다. 그들의 회의와 고민을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회의를 갖게 하는 집단으로 전락했는가? 예수를 교리화 하고 교리 속에 가두어둔 예수를 믿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가르친 교회와 목회자들의 책임이다. 나 또한 진짜 예수가 아닌 교리화 된 예수를 가르치면서 교회의 입맛에 맞는 예수를 선택적으로 설교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그런 교육과 신학에 길들여졌음으로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시 교회를 바꾸어야 한다면 제일 먼저 교리로 분칠한 예수를 떠나보내야 한다. 그 예수는 더 이상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는 요리되지 않은 날 것의 예수다. 교리가 아닌 성서 속의 갈릴리 예수다. 안식일 날 바리새인들과 논쟁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부수라고 소리치던 분노하는 예수다. 율법과 종교권력에 주눅 들지 않았던 예수다. 그는 죽어도 정의를 외치고 성전주의자들을 비롯한 교권에 대하여 저항했던 예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부활의 예수다. 오늘은 고난의 날들이지만 다가올 부활의 미래를 상상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고 가르치신 예수다. 종교권력을 두려워하여 그들과 타협하고 그들의 부역자 신세를 선택한 자들은 진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교리화 된 제도로서의 종교를 신앙하는 것이다. 그것은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말한 만들어진 신, 아니 만들어진 예수를 믿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디로 갈 것인가? 화려하게 포장되고 그럴듯하게 화장한 예수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갈릴리 예수를 따를 것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갈릴리 예수를 따라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갈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