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가 전화를 했다. 내방에 걸린 “똥”그림을 그려준 친구다. 바울이 자신의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긴다는 빌립보서 3장 8절의 말씀을 이미지화한 그림이다. 그 친구가 대뜸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한마디를 던진다. 새로운 교회가 어떤 교회일까를 생각하던 차에 들려온 친구의 한마디가 계속 마음에 남아 되새김질을 하게 한다.
도대체 새로운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 40년 전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부터 내게 화두는 언제나 교회였다. 교회란 무엇이며 진정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내 목회와 삶에서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고민의 결과로 만든 것이 오늘의 나섬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가 오늘 교회의 모습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꿈꾸었고 나섬은 그 작은 고민과 고백의 실현이다. 30여년 나섬의 목회를 하면서 나는 그런 고백 위에 내 삶을 헌신했고 그 열정으로 만들어진 것이 몽골학교를 비롯한 나섬의 사역이다. 그런데 다시 새로운 교회를 말하는 친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교회라는 말에 깜짝 놀라 내 마음에 계속 남아 나를 흔드는 그 알 수 없는 새로운 교회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늘 이렇게 다시 새로운 교회라는 말에 깊이 침잠하는 것은 내가 즐겨 쓰던 문법 중 새 길 찾기 또는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운동이라 했던 것이 어쩌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나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지 못했다. 새로운 교회는커녕 아무런 열매도 없는 허무한 목회자의 삶을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오면서 우리의 교회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어찌 이리도 무기력해질 수 있을까? 단 한 번 힘을 쓰지도 못하고 우리는 절망의 터널 속으로 내동댕이쳐져 버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토록 충성하던 교인들은 큰비가 내리기전 재빨리 땅속으로 사라지는 개미들처럼 사라졌다. 여전히 밖에는 큰 홍수가 멈추지 않고 있으니 그 개미들의 모습은 당분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모두 그들만의 동굴을 짓고 땅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예배당을 짓고 교회를 확장하는 꿈을 꾼다. 새로운 교회란 교회를 짓고 공간을 더 확장하는 것이 아님을 다 알면서도 또다시 부흥과 성장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망하는 것을 바라고 교회를 저주하며 기독교를 조롱하고 있건만 우리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코로나가 끝나면 더 큰 교회를 해야지 하면서 욕망의 칼을 다듬고 있다.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고 싶다. 이제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겠지만 제대로 된 교회를 그려본다. 이제는 정말 작은 교회다. 작은 교회라도가 아니라 작은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는 확신이 든다. ‘작아서 좋은 교회’를 만들고 싶다. 나그네를 사랑하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하는 소수의 깨어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교회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제라미 러프킨의 말이 생각난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생각할 때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작게라도 현실 속에서 행동할 때다. 그래서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과 이란의 페르시아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를 터키에서 시작하고 싶다. 한 곳에 머무르는 교회가 아니라 어디든 달려 나가는 살아있는 공동체를 꿈꾸어 본다. 모든 교인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삶으로 실천하기위하여 짐을 싸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현장 속으로 찾아가는 교회를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교회는 작아야 한다. 작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처럼 한 열 두 명 쯤 모이는 그런 교회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광야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라면쯤으로도 감사하게 먹고 마시며 서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더 이상 큰 것에 중독되어 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