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6월 처음으로 광야라는 곳엘 갔다. 이집트의 시내광야와 이스라엘의 유대광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지만 매우 중요한 무언가가 숨어있을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광야의 민족 베드윈족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자신만의 문화와 종교를 지키며 고집스러울 정도로 광야에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불편하고 고단해 보이는 광야의 삶을 그들은 살아내고 있었다. 나에게 광야는 충격이었다. 과연 나는 저 베두윈족처럼 살 수 있을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더불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하셨다. 나는 광야에서 40일은 고사하고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것 같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아니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광야가 가진 공포다. 텅 빈 공간이 가진 두려움을 그곳에서 처음 느꼈었다.
그리고 다시 광야를 만난 것은 2000년도에 몽골의 고비 사막을 갔을 때였다. 그때에 고비에서 보았던 황홀한 일몰과 일출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손만 뻗으면 하늘의 별에 닿을 것 같은 무수한 별을 보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정말 맞다고 생각했었다. 그곳에서 나는 광야의 냄새, 창조의 냄새를 맡았다. 다름 아닌 허브향이었다.
그런데 광야와 사막은 다르다. 광야는 척박한 초원과 돌짝밭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라면 사막은 모래만 있는 곳이다. 내가 갔던 고비에는 광야와 사막이 함께 있었다. 광야의 척박한 초원에도 키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네 푸성귀인 부추였다. 우리 어머니 집 뜰에는 부추 밭이 있어 어머니는 그것으로 부추전을 하시거나 만두소를 만들고 김치도 담그셨다. 몽골 고비의 양과 염소는 영양이 풍부한 부추를 먹으며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몽골사람들은 고비의 양고기와 염소고기를 최고로 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냄새 때문에 양이나 염소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먹어본 양고기는 놀랍게도 양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 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고비가 되었다. 매년 여름에 나는 고비를 간다. 탈북청년들을 비롯하여 누구든 고비를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고비에 간다. 특별할 것 없는 곳이지만 나는 광야를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할 수 있다면 고비 광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그곳에서 길을 찾고 그곳에서 사랑을 회복하고 그곳에서 평화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을 고비로 이끈다.
그러나 분명한 이유는 광야에 나가야 하나님이 보인다는 믿음 때문이다. 광야로 나아가야 비로소 하늘이 보이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광야에 나가서야 비로소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 광야가 가르쳐주는 두려움과 마주하는 시간이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나의 교만과 불신앙을 돌이켜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곳이 광야이며 그곳에서 나는 왜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의 순례자로 살아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세는 왜 자기백성에게 결코 광야를 잊지 말라고 했을까?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반복해 광야를 잊지 말라 했다. 그들이 40년을 살았던 광야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씨앗이 자란 학교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들은 그곳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으며 마라와 므리바의 샘물을 마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의미하는 것을 밤낮으로 체험하였으며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배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광야에서만 배울 수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백성은 매년 초막절이면 초막을 짓고 광야에서의 시간을 체험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광야를 기억하고 자녀들에게 광야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는 참으로 소중하다.
왜 호세아는 그의 아내 고멜에게 거친 광야로 다시 나가자고 했을까? 부인이 이단에 빠져 괴로워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고멜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광야로 나가라 했다.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고멜의 이야기는 귀에 들려졌을까? 그리고 광야로 나가자고 말하는 호세아의 마음이 이해는 되었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특히 오늘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공간이며 영적인 고향을 잊고 산다.
문득 처음 나섬의 목회를 시작했던 그곳이 생각났다. 그곳이 어디였던가? 그때를 기억해야 한다.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때 만난 사람들이라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다. 구로공단을 거쳐 성수동에서 나그네 사역을 시작했을 때 뚝섬 방송통신대 앞에서 헌옷을 놓고 한 벌에 500원을 받고 장사를 하며 후원금을 모아주셨던 권사님들이 생각난다. 그때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다가도 눈물이 난다. 통장에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 찾아와 100만원의 후원금을 주고 홀연히 사라지셨던 권사님도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기도와 사랑으로 뭉쳐진 곳이 나섬이요, 내 인생이다. 수많은 천사들이 찾아와 나누고 뿌린 씨앗들이 자라 나섬이 되었다.
다시 광야로 나가야겠다. 가슴이 답답하고 왠지 채워지지 않은 갈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광야가 그립다. 올해에는 꼭 고비를 가려 한다. 고비에서 잊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다. 다시 광야로 가서 잊어버린 것들을 기억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고 싶다.